시판돈Sipan Don에 밤이 왔다.
아내와 나는 게스트하우스 레스토랑의 강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린 야채볶음국수와 죽순야채덮밥에 라오비어와 망고주스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부모님께 엽서를 쓰는 사이, 여행자들이 자리를 채워 간다.
“우리, 테이블을 붙이는 건 어때?”
인사를 나누자니 독일인 커플, 영국인 커플, 긴 머리의 아르헨티나 여성,
자신들은 커플이 아니라 이곳에서 만났다는 걸 강조하는 스페인 남녀,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영국인 중년 여성,
한국에서 온 우리 부부까지 모두 10명이다.
그렇게 테이블을 붙여 놓고 보니 제법 큰 파티가 될 것 같은 밤이다.
그런데 파티에서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 나올 생각을 않는다.
“우리들의 파티는 오늘밤 안에 끝나지 않겠는걸요. 음식을 다 먹으려면 말이죠.”
영국에서 온 잭Jack이 너스레를 떤다.
말할 때마다 조그맣고 동그란 얼굴에 익살스러움이 또그르르 굴러다닌다.
그의 나이 지금 스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여행을 떠나 현재 2년째 길 위에 서 있다고 했다.
여자 친구인 폴리Polly는 2년 전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둘이 다투고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이곳 라오스에서 다시 만난 거란다.
그래서일까.
마침내 한 가지씩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세상 즐거움은 다 자기네 것이라는 양
포크로 하늘까지 찔러 대며 좋아했다.
깔깔.
참 맑은 웃음소리.
이제 잭은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 섬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4년 전 다녀왔던 우리 부부의 3년간의 세계여행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지금 6개월째 아시아를 여행 중이라던 스페인 아가씨 알렉산드라Alejandra의 목소리를 높아졌다.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3년을 계속 여행했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지루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뜻이 무엇인지 안다.
길 위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면 여행은 또 하나의 삶이 되는 법이다.
여행에는 시작의 설렘과 기쁨, 성취감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지루함과 외로움, 또 쓸쓸함, 때론 절망까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감정들이 한 번의 여행 안에 다 들어 있다.
그래서 한 번의 여행을 다녀온 여행자는 한 번의 삶을 다 살아 낸 사람처럼 피로해진다.
나도 그랬다.
3년간의 여행 끝에 오랫동안 앓았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전의 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람들의 삶은 어제가 오늘 같아 3년이 하루인 양 나를 대했지만, 나는 그 간극을 매울 수가 없었다.
한 번 내려선 세상의 속도는 다시 올라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시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
당시 여행은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자극도 영감도 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4년.
간혹 미치도록 그리운 곳이 떠오르기도 했고,
당장 공항으로 달려가 그곳이 어디든 가장 먼저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도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간절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까지.
기다림.
내게 다시 일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랬다. 여행을 떠나게 하는 것도 일상이지만,
여행이 여행일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일상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잭, 폴리랑 춤 한 번 춰보지 그래.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남아메리카까지 전 세계에서 모인 수준 높은 관객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든.”
아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잭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튀어 오른다.
박수와 함께 스무 살 잭과 폴리는 참 예쁘게도 춤을 추고 별빛은 무대 조명으로 반짝이고
강물 소리는 배경 음악이 되어 흐른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