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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라오스에서 느낀 고향의 기억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02)

2011-01-22 03:25



시판돈에서 빡세까지 오늘도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는 날이다.
 
강렬한 햇살.
아마 그래서였겠지.
오토바이 운전대를 잡은 내 양쪽 팔뚝은 주인인 나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아프리카의 "니그로" 혈통으로 호적을 옮긴 지 이미 오래였다.
 
나름 꼬장꼬장한 내가 너그러울 수 있었던 건 바람 때문이었다.
물기 없는,
파란 하늘에서 황톳길을 따라 불어오는 오렌지 빛깔의 그 바람들.

라오스는 7월인데도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그리 넓지 않아도 풍요로워 보이는 논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저 멀리서 대여섯 사람들이 고깔모자를 쓴 채 손으로 모를 하나씩 심고 있었다.
트랙터와 이앙기로 농사를 짓는 한국에서는 이제 보기 힘든 풍경.
한 가족일까.
어른들은 함께 허리를 굽혀 호흡을 맞추어 모를 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대나무 집에서는 꼬마 둘이서 제대로 비틀어 짜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대나무 울타리에 널고 있었다.
그 움직임들이 어찌나 부드럽고 고요하고 또 정적인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사바이디~.”

별안간 고깔모자를 쓴 남자 하나가 그림 속에서 허리를 펴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림 밖의 여행자도 잡았던 사진기를 놓고 손을 흔들었다.

“사바이디~.”

그런데 그가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모 한 묶음을 들어 올렸다.
들어오라는 뜻이다.
모심기를 함께하자는 초대였다.

잠깐 충북 괴산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시골에서는 이제 벼농사를 기계가 짓는다고 말한다.
논 주인은 때 되면 트랙터고 이앙기고 콤바인을 불러 땅을 갈고 모를 내고 벼를 거두면 된다.
그리고 그날 기계를 운전한 이에게 막걸리 한잔 받아 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았던 마을에서 꼭 손으로 직접 모를 심는 이가 한 분 계셨다.
나는 그분을 당숙이라 불렀는데,
우리 아랫집 소 잘 키우는 하상이 형님의 당숙이어서 몇 번 따라 "당숙, 당숙" 하다 보니 입에 붙어 그리된 것이었다.

당숙은 삐뚤빼뚤 줄일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서 하루 온종일 모를 심었다.
내가 “다들 기계 쓰는데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그냥 식구들 먹을 건데 뭐 할 것 있다고 기계 쓰고 기름 쓰냐.”고 하셨다.
나는 당숙이 심은 모들이 삐뚤빼뚤 자라 누렇게 변해 가는 걸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타국에서 고향을 느낄 때가 있다.
편안하고 푸근한 느낌.
또 어떨 때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라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내게 라오스가 그런 곳이었다.
어쩌면 현재 한국보다 더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나라.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나와 모를 심고,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들어오라 손짓하는,
300km의 길을 가기 위해 버스는 하루 종일 달려야 하고,
산길에서는 손을 들지 않아도 지나가는 경운기가 여행자를 태워 가는 나라.

아내와 나는 망설였다.
햇살이 너무 뜨거웠다.
여느 여행지 같았으면 당장 바짓단을 걷어붙였을 테지만,
열대의 더위는 여행자의 모험심을 녹여 내고 있었다.
다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그림 속 모든 이들이 허리를 펴고 손을 흔든다.

“사바이디, 안녕.”

그리곤 길 양편으로 똑같은 풍경이 지나갔다.
둘씩 셋씩 또는 더 많이, 줄 지어 모를 심는 사람들.
대나무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세로 빈 논에 누워 더위를 식히는 물소들.
가끔 지나가는 "성떼우(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작은 버스)".
그 맨 뒷자리에 앉아 수줍게 웃는 사람들.
그리고 드문드문 작은 마을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