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먼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먼 곳에서 왔고,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당신을 벗어난 먼 곳에 있었다면,
당신은 당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름에 오른 당신은 멀어졌습니다.
오름의 능선은 별의 궤도를 닮아 있습니다.
오름의 능선을 보며,
오래 전에 죽은 별이 자신을 내려놓은 곳이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별이,
별의 모양이 아니라,
자신의 궤도만을 그려 냈다면,
용눈이오름의 곡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별과 별의 만남을 생각했습니다.
좋은 인연은 가까이에 있을 때는 합일이 되고,
멀어졌을 때는 관조하는 것입니다.
떨어진 인연을 갈고리로 잡아당겨 곁에 있는 것으로 하려는 것처럼 미련한 일도 없습니다.
그대가 멀리 있어서 나는 그저 당신을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어쩌면 검은 점으로 보이는 그 형체는 당신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직감으로 당신을 알아보았습니다.
작은 동작 하나에도 당신만의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허리를 굽히는 버릇이 있습니다.
연체동물처럼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고,
당신의 앞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바람을 걸어갑니다.
나는 당신의 숨소리를 듣지는 못하지만,
멀리 있는 당신의 향기를 기억합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지만,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늘 만져지는 실체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는 당신만을 느낍니다.
촉감이 지워진 자리에 그리움이 남습니다.
그리움에는 향기가 있지만 감촉이 없습니다.
그리움에는 분위기가 있지만,
현재가 없습니다.
오감이 지워진 자리에,
감각에 대한 기억이 살아납니다.
그것이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은 퇴적된 감촉이고,
더 이상의 퇴적이 없는 감각입니다.
남은 것은 감각의 유희입니다.
꽃은 땅에 졌어도 향기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움입니다. 당신은 건너편에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애타게 그리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림자 하나 치우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림자 하나 채우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이고,
당신은 나의 그림자입니다.
당신이 나이어서,
나를 보는 내 눈동자는 관조의 눈동자입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봅니다.
당신도 나를 통해 당신을 보겠지요.
당신이 나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가장 멀어서 가장 가까운 것이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의 이름은 알지만 당신이라는 실존은 모릅니다.
그것이 용눈이오름입니다.
오름은 내게 말합니다.
“여기에 다 보였는데 더 볼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눈쑥쟁이와 민들레와 땅가시나무의 꽃에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다랑쉬오름과 손지오름과 따라비오름과 동거문이오름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또 아끈다랑쉬오름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도와 일출봉과 섭지코지는 멀리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그대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대는 먼 곳에서 보았어도 반짝거렸습니다.
아니 그대는,
그대로 하나의 능선이었습니다.
먼 시간의 끝에 그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이어 붙여야 만날 수 있습니다.
미리 접어진 시간의 겹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대는 태연히 내가 있는 자리로 다가오고,
나는 우두망찰이었습니다.
나는 인연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별이 태어나 그렸을 모든 궤도를 생각했습니다.
하나의 별이 태어나 지나온 모든 길이 흔적으로 남는다면 그것이 용눈이오름의 능선일 것입니다.
그 별이 아름다웠을 때에 한해서 말입니다.
나는 그런 별을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삶을 별에 비유한 오래전의 방식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당신은 별이고,
나 또한 별입니다.
우리는 제 궤도를 걷는 별입니다.
인과 연의 줄이 우리 둘을 묶는다면,
우리는 인연으로 묶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요.
우리는 걷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궤도를 걷고 나는 나의 궤도를 밟습니다.
한 발걸음마다 시간은 흘러갑니다.
시간의 퇴적은 당신과 나의 거리입니다.
당신의 걸음마다 당신의 시간이 쌓이고,
나의 발길마다 나의 시간이 흩어집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당신에게 나의 몸이 흘러가는 것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내 몸이 그대에게 있을 때 나는 황폐해지고,
내 몸이 나에게만 있을 때 나는 외로워집니다.
사람의 말을 타인을 통해 했을 때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나의 말을 당신에게 흘려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삶보다 더 진실 된 연극입니다.
나의 별이 당신에게 닿는 순간 당신은 나와 교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만나는 순간 당신이나 나는 부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별과 별로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관계되었습니다.
나의 관계는 당신이고,
당신의 관계는 나입니다.
나는 당신을 통행 해석될 것이고,
당신은 나를 통해 해명될 것입니다. 용눈이오름에서는 당신이 나이고,
내가 곧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래서 안녕!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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