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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행자가 어느 한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알고 싶다면,
그는 우선 이른 새벽 거리로 나서 보아야 한다. 그곳에 잠이 덜 깬 그 도시의 맨얼굴이 있기 마련이다.
비엔티안의 새벽을 여는 것은 길고 긴 탁발 행렬이었다. 좀 과장하자면 비엔티안에는 길 하나 건너 하나씩 사원이 있는데,
그 많은 사원에서 주황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한 줄로 흘러나와
실바람처럼 거리거리마다 스며들어 갔다.
나는 비엔티안에 온 둘째 날 새벽, 한 사거리에 서 있었다.
한 줄의 주황색 실바람이 강변 쪽 길 끝에서 나타나서 앞쪽 길 끝 골목으로 사라지는 사이에
또 다른 주황색 실바람이 반대편에서 나타나서 뒤쪽 끝으로 사라졌다.
몽환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하늘에서 이 행렬을 내려다본다면? 서로 만나지도 꼬리를 잇지도 않으면서 도시 곳곳을 돌고 돌아가는 주황색의 탁발 행렬.
나는 그 모습이 아직 어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도시에
숨결을 불어넣는 핏줄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주황색.
생명.
길.
핏줄.
꿈.
이런 단어들을 떠올렸다가 입 안에서 오물거리는 사이에
스님들이 제각각의 사원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날이 밝고 몽환의 풍경들이 안개처럼 걷히더니 거리 곳곳에서 싱싱한 피가 돌기 시작했다.
뚝뚝 얼음 조각들을 털어 내듯 인물들이 하나씩 살아나고 이내 아침 시장이 열렸다. 세상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깨에 걸친 긴 대나무의 양쪽에 대바구니 하나씩을 매단 장사꾼들의 발걸음도 부산했다.
그중에는 아직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야 할 꼬마들도 보였다.
오누이처럼 보이는 두 아이. 손을 들어 불렀다.
저 대바구니에 무엇을 담아 왔을까.
봉긋 솟은 조각보를 들춰내니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옥수수다.
이 새벽에 저 옥수수를 쪄 내기 위해 두 아이는 얼마나 일찍 일어나야 했을까?
“따오 다이?(얼마니?)” 내가 익힌 몇 안 되는 라오 말이다. 여자아이가 까만 봉지에 따끈따끈한 옥수수를 다섯 개 담아 주고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친다.
이천 "낍Kip".
우리 돈으로 300원 정도의 돈이다.
다시 다섯 개를 더 달라고 했다.
꼬마가 다섯 개에 하나를 더해 여섯 개를 넣어 주며 미소 짓는데,
그 미소가 어찌나 맑고 싱싱한지 그 미소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나는 다섯 개의 옥수수를 더 주문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였다.
단돈 600원에 작지 않은 행복을 쥐어든 그날 새벽,
여행자는 어쩌면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것도 같았다.
오래전부터 비엔티안은 위앙짠이었다. "달이 걸린 땅"이란 뜻이다.
프랑스인들이 식민 시절에 지어 준 비엔티안이라는 이름 이전에 이렇게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 자체로 본다면 비엔티안은 특별히 예쁜 도시는 아니다.
오히려 밋밋하거나 펑퍼짐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여러 여행자들로부터 비엔티안 보다는 루앙프라방이 좋다는 이야기,
비엔티안에는 그리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등을 들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날 새벽 나는 비엔티안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도시를 찬찬히 걷기 시작했다. 한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알고 싶은 여행자가 도시의 새벽을 본 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하루 종일 도시를 걸어 보는 것이다.
무엇을 봐야지,
무엇을 해야지,
혹은 어디로 가야지 하는 특별한 욕심도 방향감각도 잊어버리고
그저 도시를 하루 종일 걸어 보는 것이다.
다리가 아프도록.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