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 뚜벅···. 약간은 무거운 듯 하면서도 경쾌한 아버지의 구두소리가 문밖 가까이 들립니다. 잠시 후,
싸아한 바람 냄새와 함께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고
나는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인사하며 "아, 오늘도 안 드셨구나." 하는 안도감에 작은 탄성을 마음 속에서 내뱉습니다. 엄마와 동생들의 표정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 인 듯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집의 저녁 분위기는 아버지가 만드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술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애주가이신 아버지로 인해 지난 수년간 우리집은 바람잘 날이 없었습니다.
한번 드시면 꼭 끝을 보고야 마는 아버지는 거의 매일 폭음을 하셨고,
인사불성이 되신 아버지를 모셔 가라는 전화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엄마와 나는 여기저기,
술집에서 쓰러져 주무시는 아버지를 양쪽으로 부축하여 집으로 모셔 오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다툼, 싸움,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올라가는 아버지의 손바닥.
어머니는 서럽게 흐느껴 울고 어린 나는 엄마 옆에서 같이 따라서 울었습니다.
아버지를 전혀 딴 사람으로 만들고,
어머니를 울게 만드는,
그리고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술"이라는 것을 증오하면서···. 그 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시면서 우리 집은 기울대로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술이 완전히 아버지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몇날 며칠 집에 안 들어 오시는 것은 예사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집에 들어 오시는 날엔 한바탕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을 단칸방에 놔두고 우유 배달을 시작하셨습니다.
우유 배달 뿐 아니라 어머니가 안 해본 일은 거의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생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알콜중독에 대한 여러가지 책자를 읽으시며 여기저기 문의를 하기두 하셨습니다.
술마시는 남편을 둔 아주머니들이 으례 그렇듯
어머니도 예외없이 술 끊는다는 약이면 비방을 쉬지 않고 써 보기도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되풀이되는 폭음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 가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일 역시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미용 기술을 배우셨고 자격증을 취득하신 후,
동네에 미용실을 개업 하셨습니다.
그곳은 방 두 개와 조그만 부엌이 딸린 아주 작은 곳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때 한동안 작은 신문사에 취직을 하시고 좋아하시는 술을 자제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또 다시 손님들이 북적대는 미용실 홀 바닥에 만취된 상태로 드러눕는 등
다시 술을 입에 대셨습니다.
아버지의 벌건 얼굴을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기 누워있는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죽을 때까지 미워할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저는 다짐 또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나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우리는 그저 말뿐인 부녀지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차라리 두 분이 이혼하셨으면 하는 생각과
나는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집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느 때처럼 술취해 들어오신 아버지가 휘청이시다
그만 엄마가 계신 쪽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엄마의 무릎인대가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려대 병원에 두달간 입원하여 수술을 받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신 듯
어머니가 입원하신 두달간 단 한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언제까지 갈까" 하는 생각으로 어버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물리치료를 받으며 아파서 눈물을 흘리실 때
곁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맹세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난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온전하신 모습으로 우리 가족들에게 돌아오셨다는 것을···. 어쩌면 내 생각이 섣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매일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퇴원 이후 술을 전혀 드시지 않았으며
매일 웃는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저녁무렵 귀를 쫑긋하며 있다가 듣게 되는 아버지의 경쾌한 구두 소리는
저에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집은 더욱 밝아집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주셔서요.
아버지, 힘들게 참아내신다는 것 잘 압니다.
아버지의 그러한 노력에 장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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