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라오스에서는 비가 몰래몰래 내립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 다녀갔는지 소복소복 길을 적시고 있어요.
언제나 아침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고,
밤사이 빗소리를 들은 기억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드디어 비를 보았지요.
여섯 시나 되었을까요.
쏴아아, 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이층 발코니로 달려 나갔습니다.
따다다다따당.
따당땅땅.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예쁜 소리.
비가 길 건너 가게의 양철 지붕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어요.
그 아래 처마에는 사람들이 맨발에 조리를 신고 조르륵 나와 비를 보고 섰는데,
그 풍경이 그리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엽서에 다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날은 방비엥에서 이틀째 되던 날 아침이었다.
지금도 중학교나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이런 걸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방비엥은 중국 구이린과 베트남 하롱베이와 더불어 세계 3대 카르스트 지형에 속하는 곳이다.
즉, 아주 아름답고 기이한 봉우리들과 동굴들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주변에 동굴 탐험이나 트래킹 코스도 많고 그래서 세계의 배낭여행자들이 몰려드는 곳이 방비엥이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도착한 날까지 포함해 이틀 동안
하루 종일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더빙된 한국 영화와 지나간 중국 무술 영화를 보거나,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은 도마뱀을 응시하며 할 일 없이 빈둥거렸다.
게으름.
장기 여행과는 달리 한 달 정도의 여행길에서 이런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시간이 아까워서 부지런을 떨며 돌아다닐 거라 생각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길든 짧든 한 번의 여행은 한 번의 여행이었다.
그 안에 시작과 설렘과 흥분과 피로와 지루함과 그리움이라는
여행에 존재하는 한 사이클의 모든 요소들이 빠짐없이 찾아들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식사 때가 되어서야 겨우 게스트하우스를 나섰고,
그마저 아침은 길 건너 식당에서 샌드위치로 때웠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꼭 한 번씩 강가에 다녀왔는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올록볼록 산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황토 빛의 강물을 길게 건너는 나무다리와 배가 있었다.
어느 아침은 물안개가 하얗게 피었다가,
또 어느 저녁은 노을 진 하늘빛과 물빛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그곳에는 늘 다른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강가로 길을 잡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하늘은 말갛게 개어 있었다.
이틀째 들락거리는 식당 아주머니가 알은체를 한다.
요플레를 사기 위해 옆 구멍가게에 들렀다.
오늘도 아이들이 나와 있다.
그중 한 아이가 나를 보더니 일어선다.
구멍가게의 주인장이다.
그런데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 아이가 공기를 던질 순서였는데 내가 온 것이다.
난 아이의 그 뾰로통한 표정을 더 오래 보고 싶어 일부러 냉장고 안을 이것저것 들여다보다
천천히 냉장고 문을 열고 더 천천히 요플레 하나를 골라냈다.
“얼마니?”
“오천 낍!”
어제도 사 갔으면서 왜 또 물어 보냐는 말투다.
내게서 돈을 받으면서도 아이의 눈은 이미 공기놀이에 가 있다.
나는 아이들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틈틈이 기회를 노리다 불쑥 끼어든다.
“나도 공기놀이 잘 하는데, 끼워 주라.”
“…….”
“NO!”
이방인의 침입에 잠깐 당황한 꼬마들.
무슨 상황인지 아직 정돈이 안 되는 분위기를 뚫고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온다.
싫어요!
구멍가게 주인장 꼬마다.
좀 전에 내가 골려먹은 것에 대한 앙갚음인 셈이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 아이는 퍽이나 단호하다.
아이들은 내가 끼고 싶어 지켜보고 있으니까 놀이가 더 재미있어진 모양이다.
깔깔.
깔깔깔.
신이 났다.
발걸음을 옮겨 강으로 향했다.
두두두두두.
별안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꺄악.
꺅.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사원으로 뛰어 들고 우리들도 레스토랑 처마 밑으로 비를 피했다.
빗줄기가 참 시원했다.
그리고 맑았다.
비는 내리면서 거리의 모든 것들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이제 그만 게으름을 털고 일어서야겠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