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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시속 4킬로미터의 세상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76)

2011-01-26 22:20



여행을 하다 보면 세상을 보는 시선에도 속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속도로와 국도와 비포장 산길과 오래된 도시의 골목길을 다니는 여행자의 속도가 제각각이듯,
그 안에서 만나는 삶의 속도 또한 다르다.
시속 100킬로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볼 때와 시속 50킬로의 오토바이를 타고 보는 세상이 다르고,
다시 시속 20킬로의 자전거 세상이 다르며,
두발로 걸어 다니며 시속 4킬로로 만나는 세상과는 또 다르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시속 4킬로의 세상이다.
발뒤꿈치만 살짝 들어도 담장 너머에 널어 둔 빨래와 대바구니 안에서 잠든 예쁜 아기와
모이를 찾아 분주하게 쫓아 다니는 닭들의 세계가 다 들여다보이는 속도가 시속 4킬로다.

또 그것은 가끔 예기치 않은 만남을 가져다주는 속도이기도 하다.
방비엥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아침 일찍 "땀 푸 깜"으로 향하고 있었다.
"땀 푸 깜"은 "땀"이 라오 말로 "동굴"이라는 뜻이므로 "푸 깜" 동굴이라 불러야겠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블루 라군Blue Lagoon으로 통한다.
그곳 동굴 아래에 아름다운 옥색의 호수가 있어서다.
여행자들이 그곳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뚝뚝"을 부르기도 하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렌트하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1시간쯤 걸었고 마을 하나를 지났을 때다.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경운기를 몰고 가다 멈추어 섰다.
올라타라고 우리에게 손짓했다.
뜻하지 않은 상황.
갑자기 시속 4킬로의 세상이 시속 20킬로의 세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싫지 않았다.
소년은 여드름 가득한 얼굴로 흐흐 웃으며 자신을 “뜨.”라고 소개했다.

덜컹덜컹.
 
산골의 비포장 길에서 시속 20킬로의 세상은 그리 안락하지 않다.
엉덩이에서 신음 소리가 올라올 즈음에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처마 밑에서 배를 짜던 할머니도 논에 서있는 마을 사람들도 일하던 손을 들어 반갑게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속 10킬로의 여행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조금 전 자전거를 타고 도보 여행자인 우리를 앞질러 가며 뜨거운 태양을 향해
 
“좋은 날입니다!”
 
하며 얄밉게 소리쳤던 두 영국 친구들이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당신들 말이 맞았어요. 정말 좋은 날인걸요!”
 
길은 때 맞춰 오르막이었고 소년이 운전하는 경운기는 시속 10킬로의 여행자들을 뒤로하고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헉헉.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웃통을 벗고도 땀을 비처럼 흘리는 그들이다.
괜히 좀 미안하긴 하다.
어느새 소년의 집에 닿았다.
그는 경운기를 대고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그 사진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나랑 닮은 사람들.
한국인들이다.
애써 태워 달라고 손들지도 않았는데 우리 부부를 태워준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온 Youth 자원봉사단원들이 풍물을 치며 이곳 아이들과 신명나게 놀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곳에 소년과 그의 동생들도 있었다.

물 한잔을 얻어 마시고 해먹에 잠시 누웠다가,
우리도 그들처럼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올해 겨울 이곳 라오스를 다시 여행할 생각이다.
그때는 12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아마도 그때 다시 "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이 한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망고나무도 알려 주고 경운기 운전하는 모습도 보여 줄지 모르겠다.
그날에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함께 웃을 수 있으리라.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