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깨어 산국차를 마십니다. 뜨거운 물에 마른 꽃을 넣으니,
국화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
새벽에 마시는 차는 여유가 있어서 좋습니다.
홀로 깨어 산국차를 마시며,
추운 날씨에 떨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집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과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사람들의 언 손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차 한잔 건네는 것이 사람다운 마음일 것인데,
그런 마음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차 한잔을 마시며,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려 봅니다.
나로 인해 상처를 받고,
나로 인해 아팠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받았던 상처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내상이건 외상이건 상처는 아물어도 상흔은 남게 마련입니다.
지구가 경험한 과거의 상처가 지구의 풍경이 되었듯,
내게 남은 상흔들이 나의 풍경입니다.
어떤 관계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아파하지만 말고,
새로운 풍경이 생겼다고 생각할 일입니다.
다만 그 풍경의 최종적인 모습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상처로 상처를 덮으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상처를 가만 바라보며,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불어 가는 동안에
상처가 저만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만의 별에 피를 묻히며 살아가는 것이니,
어찌 아름다움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꽃피는 상처가 있을 것이고,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야 할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차 한잔을 마시다 말고 밖에 나와 하늘을 봅니다.
날은 춥고 별들은 반짝입니다.
하늘의 농사꾼은 쉬지를 않고,
하늘 농사에는 흉작이 없습니다.
하늘은 늘 움직이지만,
변함없이 우리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하늘 같은 마음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산국차를 만든 것은 3주 전이었습니다.
집 주위에 산국화가 활짝 피어 있어서 산국화를 딸 욕심에 새벽부터 나섰습니다.
작년에 만들어 마셔 본 국화차가 하도 좋아서 이번에는 욕심을 내었습니다.
옆집에 살고 있는 삼춘
(제주에서는 낯선 사람일지라도 아저씨나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할 연배 이상이면 다 삼춘이라 부르지요.)
을 찾아갔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집에 불이 켜지기에 조금 기다렸다가 찾아갔습니다.
올레를 지나 마당에 이르니, 텔레비전 소리가 났습니다.
삼춘에게 우리 집 일을 좀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뭔 일 할 낀데?” “예, 꽃 좀 따려고요.”
삼춘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수월봉이랑 자구내 가는 바닷가 길에 산국화가 많이 있잖아요? 그것 좀 따려고요.”
삼춘은 약간 어이없어 하면서 국화꽃처럼 웃었습니다.
여덟 시에 일을 시작하자고 말해 놓고,
이번에는 앞집 삼춘을 찾아 갔습니다.
마당에 차가 대어진 것을 보니 아들이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그런 일은 안 한다고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옆집 삼춘이 벌써 왔습니다.
“어떻게 하우꽈?”
삼춘이 묻기에 그냥 꽃만 따면 된다고 말해 주고 양동이 하나를 들려 주었습니다.
삼춘을 보내고 나서 우리도 그릇을 들고 꽃을 따러 갔습니다.
바다의 푸른빛과 산국 꽃잎에 어리는 노란빛은 잘 어울렸습니다.
꽃은 노랗게 익었고,
바다는 청동 빛으로 새벽을 열고 있었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정성껏 땄습니다.
꽃을 따면서 한 줄기에서 올라온 꽃을 죄 훑어 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삼분의 일쯤 따고 삼분의 이는 남겼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봉오리가 터지지 않는 꽃을 주로 땄기에 수확은 별 볼일이 없었습니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을 생각으로 옆집 삼춘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삼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산으로 들로 삼춘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물론 삼춘의 집에도 몇 번이나 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국화꽃이 되어 숨었는지, 삼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 밥을 먹고,
오후에도 국화를 따러 나갔습니다.
한참 동안 일을 하는 동안에도 삼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후 네 시가 되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꽃을 차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꽃을 찬물에 풀어 놓으니,
수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뜬 것 같았습니다.
동시에 집 안이 국화 향기로 환해졌습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사람 소리가 났습니다.
옆집 삼촌이 왔을 것으로 짐작하고 문을 열었더니,
앞집 삼촌이 함께 있었습니다.
“두 분이 같이 했어요?” “그랬수다.”
삼춘들은 꽃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양동이 가득 활짝 핀 산국화가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앞별이 있고,
그 뒤에도 수많은 별이 있듯이,
양동이는 꽃의 우주였습니다.
덩달아 삼춘들의 얼굴에도 노란 꽃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꽃을 따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열여섯 소녀 때로 돌아간 시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았습니다.
“고생 했수다예.”
우리는 몇 겹의 시간을 가져와 쪘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한지를 깔고,
거실과 서재 바닥 가득히 꽃무늬를 놓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꽃차를 마시니,
말에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한잔의 산국차를 마시며,
솟아 나오는 데 몇 십 년은 걸린다는 용천수가 지나온 길과,
비와 바람의 할큄을 묵묵히 받아들였을 산국화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어느 생이고 상처가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꽃에 들어가 꽃이 되어 웃었을 삼촌들의 미소를 떠올려 봅니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어도 꽃은 꽃을 피우고,
하늘이 아무리 어두워도 별은 제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한잔의 차를 마시며,
꽃 한 송이에 들어 있을 비의 마음과 바람의 마음과 꽃 뿌리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비바람이 주는 고통을 아프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고맙게 여겼기에,
꽃은 자기를 견디어 꽃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구별에도 그런 사람꽃이 가득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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