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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시간이 멈춘 골목길에서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88)

2011-01-29 17:38



 
루앙프라방의 하루는 눈부시다.
비단 눈부시게 맑은 날이 많아서는 아니다.
내게 루앙프라방의 하루가 눈부신 이유는 따로 있다.
골목길이다.
나는 몇 년 전까지 노래방에서 제일 잘 부르는 십팔번이,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라고 시작하는 신촌부루스의 <골목길>이었을 만큼 골목길을 좋아한다.
루앙프라방의 골목길은 바로 그 노래 가사처럼 여행자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날은 루앙프라방에서의 나흘째였다.
아내는 더위를 먹고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쉬고 있었고,
나 홀로 우체국을 들러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엽서를 부치고 나서 어슬렁거리며 골목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길은 라오스 최고의 고도(古都)답게 품위 있으면서도 수수했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지어졌을 유럽풍 건물들의 창호가 참 예뻤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보이는 사원이 파란 하늘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골목마다 수북수북 내려앉은 정오의 빛과 그림자는 절반씩 그 영역을 나누어 차지하고선,
자전거나 빨래나 오토바이와 같이 그곳 골목길에 서 있는 것들에게
흑백의 명암이 주는 지극하고도 단순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그 길을 걷고 있으면 우리들의 인생사라는 게 그리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을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세계의 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녀 보았다.
골목길에는 제각각의 얼굴이 있고, 냄새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인도 바라나시의 골목길은 단연 지상 최고 수준의 미로였다.
그 시작과 끝을 감히 감지할 수 없을 지경이다.
길은 넓어야 두세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지만 늘 사람과 자전거와 소로 뒤엉켜 있으며,
아무런 규칙도 경고도 없이 꺾어지며 얽히고설켜 돌아갔다.
또 소똥과 가래침과 쓰레기가 더럽게 나뒹굴지만,
향료와 비단과 장식품들의 화려하고 신비로운 빛 또한 가득했다.
몇 번이나 지나갔던 길도 잃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또 길을 찾아 헤매다 보면 어느새 제자리에 돌아와 있곤 했다.
그렇듯 내게 바라나시의 골목길은 우주에 질서가 부여되기 이전의 "혼돈의 세상"인 양 쉽고도 어려우면서도 신비로운 길이었다.

그리고 내게 또 하나의 인상적인 골목길은 이란의 야즈드였다.
무려 2,5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 도시와 골목길은 모래바람이 적잖이 부는 날에 인상적이었다.
그 오래된 모래도시는 길과 집과 담벼락이 모두 모래 색으로 하나여서,
거센 모래바람이 불어닥칠 땐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나서 조심스레 눈을 뜨면 세상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을 것만 같았다.
그날 길 끝에서 온몸에 까만 차도르를 둘러쓰고 걸어오는 이슬람 여성을 보면서
나는 검은색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래세상의 끝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그 모습에 어쩌면 삶은 힘겨워서 아름다울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도 더 많은 골목길이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모든 골목길에는 각각의 얼굴이 있고 이야기가 있었다.
루앙프라방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나절에 귀엽게 호객행위를 하던 어린 뚝뚝 운전사는 운전대 위에 발을 걸어 둔 채 곤히 잠이 들었다.
그 아래 골목길로 접어들자 담벼락 그늘 아래에서 어미 고양이가 잠든 아기 고양이를 가만히 핥아 주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서 향신료를 파는 노점의 할아버지 역시 잠이 들었다.
다시 골목길을 바꿔 돌아서니 제법 규모가 큰 사원이 나왔다.
사원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망루 모양의 북치는 정자에 올랐다.
백팔 번 북을 치다 잠들었을까,
스님의 잠든 얼굴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여기가 이 사원에서 가장 시원한 곳인 모양이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정오의 뜨거운 태양이 루앙프라방 하늘 한가운데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눈이 부셨다.
온 세상이 오수(午睡)의 시간이었다.
모두가 잠이 들고, 여행자만 홀로 깨어 있었다.
여행자는 마법에 걸린 듯 골목길을 쏘다녔다.

풍경들이 아주 느리게, 마치 정지한 장면인 듯 천천히 펼쳐졌다.
이상하게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멈춘 상태에서 나만 또렷이 깨어 그 모든 것들을 인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루앙프라방의 골목길은 그렇게 고요하게,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날 루앙프라방의 골목길에서 보낸 한나절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눈부신 시간이었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