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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정수기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87)

2011-01-30 17:55

 


요즘 수돗물을 끓이지 않고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흔히 수돗물을 그냥 마신다.
그만큼 소독약 냄새가 덜하기 때문이다.
어른이고 아이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제주에서는 괜찮아요.”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제주는 확실히 물과 공기가 좋다.
공기가 좋은 이유야 이렇다 할 산업 단지가 없는 섬인데다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 큰 산인 한라산이 버티고 있기에 수시로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불어오는 덕이다.
 
거기다 바람이 세기까지 하니,
인간의 호흡으로 뱉어지는 이산화탄소나 자동차의 매연도 머물고 있을 틈이 없다.
인간의 노화를 방지하고,
모든 것의 산화를 막아 주는 피톤치드가 가장 많은 곳이 숲과 바닷가라고 한다.
제주는 그것들을 아주 가까이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제주 사람은 늙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물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의 마을은 대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물 때문이다.
화산섬인 제주는 물 빠짐이 좋다.
땅에 내린 비는 금방 스미어 버린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논농사를 짓는 곳이 거의 없다.
그렇게 땅속으로 스며든 물은 땅 밑에 감추어진 많은 구멍을 지나면서 걸러진다.
즉 숨골(지표 아래 숨어 있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라 불리는 구멍,
구멍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정수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주 섬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정수기다.

인간이 만든 정수기는 기껏해야 대여섯 개의 필터를 거칠 뿐이다.
하지만 제주의 물은 최하 몇 십 년 동안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많은 필터를 거쳐서
용천수로 솟는다.
마치 참숯과도 같은 숨골의 미세한 구멍을 통과해 온 물이니,
그 깨끗함이야 비할 데가 없다.
심지어는 몇 백 년의 정수 과정을 거친 후에 솟는 용천수도 있다고 한다.

마을이 있는 곳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우물이다.
거개의 제주 우물이 바닷가에 있긴 하지만,
중산간에도 우물이 있는 곳이 많다.
그런 곳엔 다 마을이 있었지만,
이 섬의 불행한 역사인 4.3 사건을 겪으면서 다 소개되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옛 마을 터가 아닌 곳이더라도 중산간 지역에 마을이 형성된다.
그것은 도로의 발달과 수도 덕분이다.
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고,
스위치만 누르면 밥이 지어지는 세상이니,
한라산 꼭대기라고 하더라도 마을이 생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여전히 제주의 마을들은 바다를 기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수돗물을 먹는 시대가 되었어도,
자연의 정수기에 기댔던 옛터를 쉽게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을의 근간이 되었던 우물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신엄리의 노꼬물,
고내리의 시니물,
곽지의 과물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중엄에 있는 "새물"에 갔다.
오랫동안 보아 왔던 우물이다.
얼핏 보면 스쳐 지나가기 쉽지만,
사실 중엄의 새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물터이다.
제주 사람들이 물을 어떻게 썼는지,
우물의 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맨 위 칸은 식수로 썼고,
다음은 음식을 씻는 물,
그 다음은 목욕물이나 빨랫물로 썼다.
마지막 네 번째 칸에서는 민물 맛을 보려고 달려온 바닷물고기들이 산다.
네 번째 칸의 물과 바닷물은 구멍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락거린다.
민물과 바닷물의 교합이다.
그 엉김,
그 섞임 속에서 많은 생명이 태어난다.

어떨 때 바닷물은 발정기에 이른 수소 같다가,
또 어떨 때는 제 꽃잎을 버리는 쑥부쟁이같이 순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드나듦이 없었다면
바다의 생물도, 민물의 생물도, 육지의 생물도 없었으리라.

일개 도의 규모로는 가장 작은 것이 제주도이지만,
만물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데는 제주도만 한 데도 없다.
한라산이 남한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같은 날 보는 꽃도 해발에 따라 다르다.
 
날씨 또한 마찬가지여서 애월은 맑았는데,
산 깊은 곳에서는 큰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제주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도 알아낸다.
큰비 내린 뒤 바다를 보면,
노 화백의 에메랄드 빛 화폭에 철모르는 손주가 똥 싸지른 듯한 그림을 만날 수 있다.
그럴 때면 제주 사람들은 말한다.

“큰 산에 큰물 들었수다.”


초록 바다에 똥색이 무더기무더기 묻어 있는 것이다.
건천인 제주의 강도 이때는 드러난 핏줄이 되어,
하천의 낭(표면에 드러난 동굴 같은 구멍)을 더 깊게 한다.
그런 날이면 아무리 맑다는 "새물"에도 오수가 흘러들어 물이 노랗게 변한다.

맑은 물에 먹 틔듯 그리 되지만 연이어 솟는 샘을 당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맑은 것이 흐린 것을 이긴다.
한 명의 악을 백 명의 선이 결국 이기듯,
끊임없이 솟는 힘은 덮으려는 거짓을 물리치는 것이다.

다시 물이 맑아진다.
겨울이어도 차갑지 않다.
이 물은 철 따라 날씨 따라 온도가 달라지는 물이 아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갑다.
그것을 항을 지켰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저 물처럼 변함없을 수 있다면,
당신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물 같아라, 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항상 제주의 물같이 살면 된다.
맑아지려 몇 십 년 살았지만, 난데없는 빗물로 더렵혀지기도 하는 물,
그러나 금방 본성을 찾는 물,
그게 제주의 용천수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