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여행 중에 비가 오면 특별한 날이 되곤 하는데,
그것은 여행지에서 기대하던 하루 일과가 어그러지긴 해도,
의외의 상황을 만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아내와 내가 라오스 여행의 마지막 도시로 선택한 폰사반Phonsavan은 동북부 산악 지역의 소도시였다.
간혹 여행자들이 이곳을 베트남과의 국경을 넘는 길목으로 선택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되나 아직 그 용도와 기원에 대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항아리 평원"이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루어지기 힘들 모양이었다.
새벽 시장을 다녀와 한숨을 더 자고 나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히려 빗줄기가 더 굵어진 것 같았다.
빗속에 오토바이를 타고 진흙길을 달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신비의 항아리"를 포기하고 비옷에 조리를 신고서 철버덕,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내친 김에 버스표를 끊으러 3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버스터미널에 다녀오기로 했다.
빗물이 시원했다.
도심을 벗어나자 논과 푸른 초원의 구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빗소리 사이로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전해졌다.
초등학교였다.
점심시간인지 아이들이 와글와글 뛰어놀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한 아이가 철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아이의 어깨 너머에서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뒷짐을 진 채 슬며시 다가가서 잽싸게 고무줄을 뛰어넘었다.
아이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다시 한 번을 뛰어넘었다.
우와~, 함성과 웃음이 터졌다.
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제법 우쭐해진 나는 이번에는 두 번을 연속해서 고무줄을 뛰어넘었다.
나름대로 난이도 높은 재주넘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끝이 살짝 고무줄에 걸리는가 싶더니 내 몸이 공중을 휘익 날았다.
이런…….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
엉덩이의 희생으로 얻은 대가 치고는 괜찮았다.
벽에 붙은 아이들의 성적표가 눈에 들어왔다.
한 남자아이에게 네 이름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는데, 6등이다.
그 성적표를 찍으려는데, 렌즈 속으로 불쑥 아이들이 뛰어든다.
“그래, 다들 서 보렴, 예쁘게 사진 찍어 줄게.”
안으로 모이라고 손짓하는데 그중에서 덩치가 큰 편인 여자아이 하나가 아이들을 모두 밖으로 내몬다.
내가 성적표를 잘 찍게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야, 다들 모여 봐, 아저씨가 사진 찍어 줄게. 자~, 능 송 삼.”
한국말로 "하나 둘 셋"을 세며 사진을 찍으려는데
그 여자아이가 이번에는 아이들 세 명만 남기고 밖으로 나가도록 교통정리(?)를 해 준다.
내 말을 오해한 것이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모든 영어를 사용해 이방인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고,
아내는 바짓단을 잡고 손끝에 매달리고 가슴으로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의 체온에 달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까만 머리들이 불쑥불쑥 렌즈 속으로 들어와 그 머루 같은 눈동자들을 깜박인다.
아, 세상 어디를 가도 아이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뷰파인더 속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어느새 휴식시간이 끝나고 떠나야할 시간.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Good-bye!”
“사바이디!”
아이들의 인사가 겹쳐졌다.
그때였다.
“See you tomorrow!”
아까 보조 카메라맨 역할을 했던 덩치 큰 여자아이다.
그런데, 내일 보자니,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나그네에게…….
내 발걸음이 굳어졌다.
물론 내일이나 모레면 또 다른 놀이에 빠져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여름 날 오후에 다녀갔던 여행자 부부를 쉽게 잊겠지만,
아마 그것이 아이들의 세계라지만,
지금 이방인에게 내일 또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 까만 눈동자에는 절실함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영상이 남고, 발끝에는 아쉬운 빗물이 채였다.
“발맞추어 나가자, 앞으로 가자, 어깨동무 하고 가자, 앞으로 가자.”
비는 내리고,
아내는 장난꾸러기 시절 우리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철벅철벅 빗물을 차내며 동요를 불렀다.
한때 그처럼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시간을 막 기억해 낸 것처럼.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