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한 알 두 알 사 모았던 수면제가 50여 알이 넘었다.
레코드판을 갈아 끼운 다음 방안 가득 흐르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나는 한입에 그것을 천천히 털어 넣었다.
"밖엔 아직도 눈이 내리겠지, 그리고 그는 그 거리, 어느 술집에 머물러 있을 테고…"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아련하게 들려 왔다.
음악 소리가 높아졌을 때 나는 야릇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스물세 살이 되던 그해 나는 무모한 자살극을 벌였으나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아직 살아있다는 슬픔보다
깨어난 것에 대해 기뻐해주는 사람들로 인해 나는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했다.
철모르던 시절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무작정 동거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내가 선택한 남자를 믿고 따랐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향락만을 즐길 뿐,
그의 마음속엔 가정이란 존재가 떠난 지 오래였다.
무절제한 생활과 무위도식을 일삼는 그를 보다 못해 나는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내가 깨어나자 남편은 자신이 잘못했다며 뼈저린 참회를 하였다.
거짓말처럼 남편은 새사람이 되었다
닥치는 대로 돈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나 역시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기고 동네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돈을 벌었다. 엄마는 그런 내 모습에 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원망하셨지만,
내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기에 나는 한마디의 불평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 그와 내가 억척스럽게 모은 돈과 약간의 빚을 내어 남편은 장사를 시작했다.
건어물 장사는 생각 외로 잘 되었고,
우리 상점은 거래처를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졌다.
성실하고 억척스러운 부부,
젊은 사람들이 허세도 모르고 자제할 줄 아는 신세대 부부가 경영하는 상점이라고.
한 푼 두 푼 모아지는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언제나 검소한 옷차림에 자제한 줄 아는 생활습관이 몸에 밴 남편과 나는 수전노처럼 돈을 아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기쁨과 행복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자제력을 잃고 아이에게만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장사는 엉망이 되었다.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루어 왔던 남편의 영장이 날아왔다.
처음에 그는 입대를 기피했으나 나의 간곡한 애원으로 입대하였다. 남편이 없는 하루하루는 더디게만 흘러갔다.
그가 군에 충실해 있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생계를 도맡았다.
죽어도 시댁이나 친정집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결심이었기에
나 혼자서라도 상점을 꾸려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했을 때는 그처럼 자상하고 원만하던 거래처들이 이상하게 나를 무시했고
다른 거래처와 비교하면 서 애를 먹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여자이기 때문인 듯 싶었다.
결국 나는 남편이 제대하기도 전에 빚더미만 껴안고 가게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이 제대를 하였고 우리는 다시 힘을 합하였다.
친분이 두터운 강사장님께서 지금과 다량의 상품들을 좋은 조건으로 밀어 주셨다.
남편과 다시 시작한 장사는 날로 번창했다.
돈은 자꾸만 불어났고 우리의 생활은 넉넉해졌다.
그러자 남편의 무절제한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승용차를 구입하고 멋진 옷에 고급술을 마시며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하던 지난 날의 전철을 밟으며 그는 타락해 갔다.
결국은 술집여자와 집을 나간 남편은 한참 후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망연자실하여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이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남편은 죄책감 때문인지 처음 몇 달은 열심히 일을 했으나
한번 수렁에 빠졌던 그는 또 다른 문제로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는 마지막 한 푼의 돈까지 그를 위해 남김없이 털어 버렸다. 얼마 후 어렵게 꾸려오던 상점은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의 해결책은 없는 걸까?
왜 내겐 이런 불행의 연속인 것일까?" 그러나 그런 고민과 걱정도 내겐 사치였고 낭비였다.
수없이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그 앞에서 나의 굳은 결심은 또다시 무너지고
또다시 나는 빚을 내어 가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장사는 그 전처럼 잘 되지 않았다.
한번 꼬이기 시작한 일은 자꾸만 어려워지고 이자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남편은 그저 방안에만 누워 있을 뿐이었다.
나 혼자 온갖 애를 써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남편은 장사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심한 욕설과 폭력을 일삼았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갔고 돈을 주지 않으면 가게의 상품들을 모두 박살냈다.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돈을 주게 되었고
결국 그는 또다시 향락의 길로 빠져서 돌아올 줄을 몰랐다. 나는 그에게 눈물로 애원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리고 나와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의 안중에는 이미 다른 여자의 생각으로 채워진 상태였기에 그는 내게 이혼을 강요했다.
죽어도 이혼만은 할 수 없다는 내게 그는 강제로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
그의 구타와 끝없이 방탕한 생활,
그리고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수백번도 더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이혼에 동의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실패와 실패의 연속으로 참담한 패배자가 된 나는 홀로서기를 시작했지만
이미 흔들린 내 마음은 삶의 의욕을 잃어 가고 있었다. 두 번째 시도한 나의 자살은 또다시 실패하여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까만 눈망울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나는 끝까지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감으로 내 몸을 추슬렀다.
"그래 이젠 아이들만을 위해 사는 거야.
내가 선택했던 삶이었던 만큼 나의 분신들도 책임져야 해."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과 천진한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삶에 대한 애착을 느꼈다. 2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면서
나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행복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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