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각자였는데,
눈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시간도 하나가 되어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나는 눈을 통해 소년이었던 나를 만나고,
청년이었던 나와 손을 잡고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참 많이도 온 날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엔 항상 친구들로 북적거렸는데,
그날도 놀러 온 친구 둘과 함께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고구마를 깎아 먹고,
어머니가 고방 깊숙이 숨겨 놓은 홍시를 꺼내 먹었을 것입니다.
눈은 내리고 날은 추웠지만,
방 안에만 갇혀 있기에는 아까웠습니다.
“야! 우리 재 너머까지 걸어갔다가 오자!” 문득 내가 제안을 하자, 한 친구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어디 간다는 거냐?” “너는 자식아! 낭만도 모르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리가 재 너머까지 걸어가 보기나 하겠냐?”
나와 다른 친구 하나의 낭만 타령에 결국 고개를 저었던 친구도 합류를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낭만을 찾아 눈발 속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도로에는 눈이 많이 쌓여 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히득거리며 눈을 헤치고 낭만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2㎞쯤 가자 벌써 발이 얼어붙었습니다.
때맞춰 산모퉁이를 돌아서 버스 한 대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처음부터 나오지 않으려 했던 친구가 너무 추우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친구는 또 낭만을 들먹이며,
처음 생각했던 재 너머까지 가자고 하였습니다.
의견이 갈렸습니다.
집으로 가자는 친구는 도저히 더는 못 가겠다며,
버스를 기다리고 섰습니다.
눈이 하도 내려서 다음 버스가 오리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너, 여기서 돌아갈 거면, 평생 얼굴 보지 말고 살자!”
결국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친구는 나와 다른 친구의 협박에 가까운 설득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셋은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재를 오르는 길은 험한데다가 너무 미끄러웠습니다.
바람은 더 거세졌습니다.
몹시 추웠습니다.
낭만도 뭣도 없었습니다.
그저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덜덜 떨면서 겨우 걸음을 옮겼습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겨우 재를 넘었고,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면소재지에 닿았습니다.
“너, 얼마 있냐?”
나는 다짜고짜 집으로 가려 했던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친구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손에 놓인 액수는 세 사람의 차비로는 부족 했습니다. “야, 우리 이 돈으로 풀빵이나 하나씩 먹고, 그냥 걸어서 돌아가자!” 친구는 무척 억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누구를 걸어오라고 할래? 너 혼자 남아서 걸어온다면, 우리 둘이 버스 타고 가고…….”
사실 돈을 가지고 있었던 그 친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개인의 소유보다는 우정이 더 소중했습니다.
결국 친구는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세 사람이 먹을 호빵을 샀습니다. 호빵은 따뜻했고,
가게 안의 갈탄 난로는 잠시나마 우리의 언 몸을 녹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잘도 흘러서 오후 세 시가 지났습니다.
서둘러 간다 하더라도 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한 친구가 서둘렀습니다.
차비를 털어 호빵을 샀던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해 떨어지면 큰일이라며,
가장 먼저 가게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표정은 밝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호빵 사는 데 돈을 다 털어서 화가 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불렀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마냥 걷기만 했습니다.
씩씩거리며 나갔던 친구는 저만큼 멀어졌습니다.
우리도 서둘러 가게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돌아갈 길이 까마득히 멀어 보였습니다.
젖은 옷에 젖은 신발에 몸은 금세 꽁꽁 얼었습니다.
다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리는 바람을 등지며 걸어야 했기에 어떨 때는 뒷걸음을 쳐야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먼 데서 버스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차비가 없었던 우리에게 그 버스는 그림 속의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호빵을 먹지 않았다면,
운전수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버스를 탈 것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그 가능성이 지워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야! 우리, 버스 타고 갈까?” 친구가 말했습니다. “있냐?” 묻는 내 말에 친구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내밀었습니다.
그 돈이면 우리 셋의 버스 요금으로 충분 했습니다.
우리는 앞서 걸어가고 있던 친구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한참 멀리 있었고,
우리의 소리가 바람소리에 묻혀서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버스에는 나와 다른 친구 하나만 타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물론 앞장서 돌아가고 있었던 그 친구의 곁도 스쳐 갔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타게 할까 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냥 가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버스에 숨은 채로, 걷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친구의 표정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치고,
그 끈이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눈길을 걸어오고 있을 친구가 걱정이 되었지만 마중을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집에 박혀 있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버스 타고 온 것을 안다면 무척 화를 낼 것이 빤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그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친구는 감기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몇 시에 왔냐고 물으니, 저녁 일곱 시쯤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곱 시 반쯤에 왔노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며칠 뒤 다시 눈이 내리던 날,
여전히 자리에 누워 있었던 그 친구에게 그날의 일을 말했습니다.
친구는 어이가 없어서 입이 벌어진 채로 표정이 굳었습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말을 했습니다.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낭만이냐?
너희는 앞으로 내 앞에서 낭만을 말할 자격이 없어.
낭만도 반밖에 모르는 놈들이…….”
그 후 우리는 그 친구 앞에서는 낭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여전히 낭만에 대해서는 절반밖에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날의 추억이 낭만이었노라고,
낭만을 다 알고 있는 그 친구에게 가만히 말 건네고 싶습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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