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은 희고 바다는 푸릅니다.
산의 흰빛은 고매한 정신 같고,
바다의 출렁이는 푸른색은 삶의 생동감과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며 산을 보다 바다를 봅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옵니다.
먼저 와 지친 파도를 뒤따라온 파도가 뉘어 줍니다.
몸이 몸을 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잊고 있었던 평화로움이 가슴 속에서 싹을 틔웁니다.
모래 위를 걷습니다.
바닷가 모래에 한 사람의 이름을 써 본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적어 놓고 부러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파도가 밀려와 지우고,
다시 지워 그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보면서 특별히 애가 타거나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름이 있었고,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적었던 모래 위에 다시 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봅니다.
이 이름 또한 지워질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옵니다.
나는 그 이름이 지워지기 전에 자리를 옮깁니다.
민물이 솟는 곳을 지나면 원담이 있습니다.
원담은 바다에 돌담을 쌓은 것입니다.
밀물일 때는 물이 들고,
썰물일 때는 물이 빠지는 지점에 둑을 쌓아 물고기를 잡는 담입니다.
원담을 보며 사랑의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어린 시절의 사랑은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상대를 전부 차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사랑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걸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랑일지라도 절실한 것이며,
진실한 것이겠지만,
이제는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대에 대한 욕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아주 조금은 나만의 그대를 갖고 싶습니다.
그 정도를 묻는다면,
바다인 그대에게서 원담만 한 크기를 내 몫으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커다란 배를 끌고 가서 그대의 중심을 들어내거나,
쌍끌이를 통해 그대라는 바다를 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써 두었던 이름은 파도가 이미 지워 버리고 없습니다.
나는 다시 손가락으로 사랑의 이름을 써 봅니다.
파도가 밀려와 그 이름도 지울 것이지만,
내 손가락에는 그 이름을 썼던 감각이 오래 머물 것입니다.
모래의 모양이 바뀌듯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다만 순정한 마음만 따스하게 남을 것입니다.
바닷가에 와서 바다에 발 담그지 못하고 바다를 바라봅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나는 내내 바다를 품에 두었습니다.
그대가 바다라면 바다를 아주 조금이라도 가두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마저 버립니다.
마음 안에 쌓아둔 원담이 허물어진 자리에 처음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것이 그대로의 바다입니다.
그대로의 당신입니다.
오늘은 바닷물에 손도 담그지 않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발을 담그거나 헤엄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대라는 바다에서 나는 그대를 그대로 두며 즐거울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대는 출렁거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싱싱한 바다로 내게 다가올 것입니다.
파도가 뒤에 오는 파도를 받아들이듯 우리의 사랑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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