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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당신은 평강공주야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65)

2011-02-11 02:48

 


그날은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결혼생활 7년 만에 치르는 "결혼식"인지라 새삼스레 가슴 떨릴 일도,
당황할 일도 없는데 하이얀 부케꽃을 든 손은 신들린 사람마냥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주례사의 말을 들으며 곁눈질로 얼핏 본 어머니는 연신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솟았다.
 
 
"절대로, 절대로 울어서는 안 돼.
내가 선택한 길이야.
나의 운명이야."
 

하지만 주례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가냘픈 어깨를 들썩이며 끝내 울먹였고
남편은 축하객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
 
1m 78m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던 남편과의 첫 만남은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아르바이트로 남성복 코너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입시준비를 하는 수험생처럼 하루 5시간 이상을 자본 적 없이 학교와 일터를 오가며
5평도 채 안되는 자취방에서 신물 나도록 라면국물만 들이키는 것으로
끼니를 대신했던 나의 대학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
 
그러나 "비록 전문대지만 졸업 후 든든한 직장에 취직만 된다면,
그래서 지금껏 고생만 하고 살아오신 부모님 앞에 두툼한 월급봉투를 떡 안겨드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뎌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남 그는 내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아르바이트로 지친 몸을 이끌고 밤샘 시험공부를 할 때도 나는 그를 떠올리며 피곤을 잊었다.
어떤 때는 퇴근길 길모퉁이에 늠름하게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곤 행복해 하기도 했고,
시험 전날엔 그가 방문 앞에 몰래 갖다 놓은 간식거리를 먹으며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서 연락이 두절된 지 보름이 지나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검열필, 수번4095"
 
라는 낯선 편지봉투를 뜯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일부러 속이려고 그랬던 건 아냐.
한탕 하고서 깨끗이 손 씻고 너랑 새 출발하고 싶었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친척집, 고아원, 넝마주이 생활, 검은손….
지난 25년은 어느 대목을 회상해 봐도 마른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황량스러움 그것이었어.
슬프고 음습했던 지난날들,
너의 환한 미소 속에 떨쳐버리고 새 삶을 살고 싶었는데…."
 

세상에 그가 사람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생활하는 해결사였다니….
엉킨 실타래 마냥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꿈꾸고 바랬던 내일이 고작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검은돈을 먹고 사는 남자와 한평생을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처한 상황이 안됐긴 하지만 내 인생까지 불우해질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불태우고 책 보따리를 쌌다.
하루라도 빨리 뇌리에서 그를 지울 수 있는 곳,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날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내 발은 땅에 얼어붙었는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4095라는 죄수번호가 섬칫하게 인쇄된 그의 편지를 이틀이 멀다하고 배달되어 왔고
드디어 나는 결심했다.
하나의 장작개비가 꺼져가는 다른 장작개비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행히 3개월의 구치소 생활을 마감하고 그는 교도소로 넘어가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곡예 같은 우리의 사랑은 주위 사람 어느 누구 하나 반겨 주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하고 그와의 교제를 정식으로 허락받기 위해 부모님을 찾았다.
철대문 앞에 무릎을 끊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또 빌었건만
꽁꽁 언 땅만큼이나 부모님의 마음은 냉정하기만 했다.

서너 평 남짓한 좁은 여관방엔 파스 냄새가 진동을 하고
밤이면 몸살 앓는 그의 신음소리가 가슴을 저미게 했다.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육중한 몸뿐이었다.
일당이 제일 많다는 막노동판에서 삽질과 지게일로 등 언저리가 빨갛게 피멍이 든 것을 보면,
비록 작은 사무실의 경리지만 책상에 앉아 근무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미안해
하루하루 지급되는 점심 값을 아껴 드링크제와 파스를 사다 날랐다.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직장 탓에
5리나 됨직한 첫 코스는 언제나 장거리 달리기 경주였다.
비록 하루 몇백 원의 토큰값이었지만 우리에겐 몇백 원, 아니 몇십 원이 아까웠다.

이렇게 각박한 현실에 처하고 보니,
가끔 나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땀내 나는 그의 작업복을 매만지며,
새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절규에 가깝도록 발버둥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어두움 골목길에서 기다리는 음흉한 도둑처럼 느닷없이 공격해오는 삶의 검은 그림자는
우리를 쉬이 비켜가지 않았다.
 
그가 막노동판을 전전한지 3개월도 채 못 되어 과로로 쓰러졌다.
그때서야 너무 바빠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씩 몸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하루벌이로는 꽤 괜찮은 수입이지만 앞날은 내다볼 수 없기에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기로 했다.
보험, 유아용 학습지 외판원, 가정용품 판매사원… 등을 두루 거치면서
그는 또 한번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일한 만큼의 대가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임금도 임금이려니와
쉽게 번 돈으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지난시절이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몇날 며칠을 자학의 술잔을 기울이며 괴로워했다.
 
그럴 때마다 죄수번호가 섬칫하게 인쇄된 편지를 보여주며,
고난이 사람을 키우고,
아픈 만큼 우리의 앞날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며 그를 위로 했다.
 

다행히 그는 조그만 인쇄소에 취직이 되었다.
당장에야 겨우 입을 풀칠할 정도의 낮은 임금이지만 기술만 익혀두면 전망도 있기에
남편은 현재의 직업에 만족해한다.
한가닥의 즐거움이나 여유로움도 누리지 못한 채 바삐 지나간 7년이었지만
늦게나마 남편이 옳은 직장을 얻었고,
부모 앞에 당당히 나타나 결혼식까지 올렸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당신은 내게 있어 평강공주야.”

늦깎이 신혼여행지에서 속삭이던 남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