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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어느 산골소녀의 꿈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43)

2011-02-13 02:09

 


"이 세상은 갈대처럼 살아야 한다.
흔들려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말이다.
누가 그랬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저는 이제 막 18세가 된 산골 소녀입니다.
가정환경이 평범하지 못했던 저는 여느 아이들처럼 아빠 앞에서 재롱 한번 떨어보지 못했고,
엄마의 따뜻한 가슴이 어떤 건지도 모르며 자랐습니다.

제가 여기에 펜을 든 것은 저의 이런 생활들에 대한 동정심을 얻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제가 쓴 글을 읽으며 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길 바라며
어렴풋이 지나간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저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의 웃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빠는 매일 술에 취해 술집 여자와 밤늦게 집으로 들어왔고
엄마는 매일 울며 외가로 쫓겨 다니셨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였던 저는 울다 지쳐 벽에 기대어 잠이 들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엄마는 저와 4살인 동생에게 새 옷을 입히며 껴안고 울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덥석 우리들을 안고 옷장 안에 넣으시며 "여기 숨어 있거라" 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외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셔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엄마는 할아버지 손에 끌려 나가는 우리의 볼을 만지며 울먹거렸습니다.
외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온 곳이 바로 이곳 강원도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친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 집이지요.
할머니는 인자하고 따뜻하시지만 할아버지는 어린 우리에게는 괴물같이 무시무시한 존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에 거동이 불편하셨고,
우리에게 자주 매를 드셨습니다.
그러한 할아버지 때문에 동생과 나는 이집 저집으로 도망 다녀야 했고
때로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모래를 주워 먹으며 울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명절에 가끔씩 다녀가셨습니다.
엄마가 오실 때마다 맨발로 마당까지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껴안고 서러움과 그리움에 복받쳐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번은 명절 음식을 먹다 체해 계속 누워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체했기 때문에 엄마가 따주신 엄지손가락의 효과도 전혀 없었습니다.
나의 아픈 모습을 끝까지 봐주지 못하고 울며 떠나시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립니다.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엄마와 나의 만남은 언제나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났습니다.

아빠는 몇 년에 한번씩 연락을 해왔는데
그 때마다 술에 취한 목소리뿐 아빠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5학년 때였습니다.
추석을 이틀 앞둔 우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순도순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유난히 전화벨이 크게 울렸습니다.
할머니께서 웃으며 전화를 받으시더니 금세 얼굴이 굳어져 동생과 나를 건넌방으로 쫓으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할머니께서는 급히 수원에 가신다며 길을 떠나셨지만 무슨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그 전화가 아빠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꼭 인사를 올리고 애들을 데려가려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교통사고 현장에서 만난 새엄마가 될 뻔했던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아빠의 뼛가루를 산에 뿌리며 이제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내가 기댈 곳이 없다는
허탈감과 서러움에 울음이 솟구쳤습니다.
우리에게 따뜻한 관심을 주지 않던 아빠였지만 아빠를 잃은 슬픔은 컸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저는 공부는 뒤로 하고 가족과도 멀어졌습니다.
"난 불행아"라는 생각에,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날뛰는 사자처럼 방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옷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편지 한 묶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국민학교 1학년이 되던 해까지 엄마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우릴 버렸다고 원망만 했던 엄마였지만,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고 때로는 밤새우시던 흔적이 편지마다 역력히 묻어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날 밤 마당가에 앉아 맘껏 울었습니다.
어딘가에 계신 엄마의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고,
이제껏 나만의 편협한 생각으로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에 설움이 북받쳤습니다.
 

그 날 이후 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소녀가 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할머니께 엄마와 나의 연락을 끊은 이유를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당황하며 머뭇거리시더니 "이 다음에 네가 어른이 되면 말해주마"하지며 얼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알 것 같습니다.
그 때 할머니께서 당황하시며 자릴 피하시던 이유까지도 말입니다.
그간 긴 시간을 헤매면서 얻은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밝을 수도, 어두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은 "그래도 난 안돼"라는 말보다
"그래 도전해 보는 거야"라는 말을 더 잘 쓰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잠든 동생의 모습이 오늘은 더욱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래, 우리 둘은 꼭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큰 나무가 되자구.”
동생의 거친 손을 잡고 말해 봅니다.
창 밖에 별이 오늘따라 더욱 빛납니다.
은은한 차 한 잔이 생각나는 정말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입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느끼지도 못했던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