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천안으로 이사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처음 천안에 이사를 왔을 때 지금의 동남 아파트 자리에는 작은 이쑤시개 공장이 있었고,
아빠는 그 이쑤시개 공장의 이사로 일하셨다.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꼼꼼하신 아버지 덕택에 생활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 다음해 이쑤시개 공장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간 모은 돈으로 공사장 인부를 상대로 하는 식당인 함밥집을 차리셨다.
함밥집은 공사가 다 끝날 무렵 한꺼번에 밥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다 쓰셨다.
그런데 공사가 다 끝나갈 무렵,
아파트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우리 집은 그 많은 식대를 하나도 받지 못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아버지는 생소하기만 한 법률서적을 뒤져가면서 재판을 준비하셨지만,
변호사를 살 수 없었던 우리 집은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재판에 지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그 길로 집을 나가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버스 운전사 아저씨들을 상대로 포장마차를 시작하셨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었던 어머니셨지만
우리 앞에선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셨다.
나는 매일 자정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를 마중나갔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손님이 남기고 간 술을 들이키시며 한숨을 내 쉬는 것을 몰래 보게 되었다.
포장마차에 그림자로 비춰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어느 시골농장에 계시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올 뿐인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어디 아프신데는 없는지 걱정이 더 앞섰다.
우리집을 덮친 어둠의 그림자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남의 땅에서 살았는데,
어머니는 땅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밥장사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그곳에 집을 지었다.
전세 삼백만 원과 삼백오십만 원으로 방을 내놓자 방은 쉽게 나갔다.
그런데 집을 지은 지 일 년만에 땅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정을 하고 애걸을 해도 주인은 막무가내였고,
서면상으로 허락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집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세입자 중에 한 명이 어머니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이 일로 한참 꿈에 부풀어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1학기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소녀가장이 되어야 했다.
어머니는 이미 경찰서로 끌려가신 뒤였다.
그 와중에 나는 어머니가 배가 고프실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쿵쾅 쿵쾅"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밥을 지었다.
노란 양철 도시락에 밥을 퍼담는데 손가락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런데 아무리 사정을 해도 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제발 도시락만이라도 어머니께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차디찬 도시락을 들고 나오는 내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학교를 결석하면서 대서소로, 법원으로 뛰어다녔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탄원서라는 것을 써서 매일 법원에 제출했다.
그 때 법원 앞 대서소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내 사연을 전해듣고 돈 한 푼 받지 않으시고 어머니가 나오실 때까지 도와주셨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학교를 빠지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 어렵게 사정을 털어놓은 날,
나는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눈물을 터뜨렸다.
왜 그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며 나무라신 선생님은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며 나를 다독거리셨다.
선생님께선 아르바이트도 추천해 주셨고,
수업료를 못 내서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처지에 이르렀을 때는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게 하셨다.
어느날부터인가는 어머니가 하시던 포장마차에 나가 장사를 하고 있는 나를
장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셨다.
그때 선생님이 아니셨더라면 아마 우리 삼남매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석 달 동안 연탄도 때지 못하는 냉방에서 지냈고,
쌀이 없어서 하루 세끼 라면만 끓여먹었다.
그때 나는 학생의 신분이었고,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주위 분들의 도움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기에
학교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선생님들의 구두를 닦았고,
저녁이면 집 근처의 횟집에서 7시부터 11시까지 설거지를 했다.
그렇게 해서 한달에 15만 원 정도의 돈을 벌었다.
다행히 동생들은 별다른 말썽없이 학교를 잘 다녀주어 그것으로도 나는 위안이 되었다.
법원으로, 경찰서로, 어머니 일로 늘 바쁘게 보내던 어느날
어머니는 100일만에 정상참작이 되어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나오셨다.
어머니가 오시던 날,
우리 삼남매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일찌감치 경찰서로 향했다.
그런데 그만 길이 엇갈려 어머니는 벌써 집으로 가고 계시지 않았다.
서둘러 돌아오는데 길가에서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는 너무 힘이 없어 걷지도 못하시면서 우리를 마중나오신 것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뛰어가 어머니를 부둥켜 안았고 한덩어리가 된 우리는 길가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얼마 안 지나 아버지도 돌아오셨다.
떠돌아다니시면서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신 아버지도 무척 야위셨다.
그간의 일들을 들으신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던 날,
선생님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나의 손을 꼭 잡으시고 빙그레 웃어주셨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철없이 굴던 남동생은 이제 다 커서 군에 입대했고
몸이 약하던 막내도 벌써 20살이 되었다.
지금은 다섯 가족이 이를 악물고 열심히 뛴 덕택에 조그만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제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해도 나는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이
나와 우리집을 끝까지 돌봐준 여러 선생님들,
대서소 아저씨,
그리고 주위분들 모두에게 보답하는 길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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