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에는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엄마, 나를 비롯해 동생 다섯 명과 아버지 이렇게 대가족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귀하고 귀한 3대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처음 저를 낳았을 때는 그래도 첫째니까,
둘째는 아들이겠지 하던 기대는 다섯명의 여동생을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한 명, 한 명의 여동생을 낳을 때마다
구박과 온갖 심한 말들을 할머니와 노할머니로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작은 어머니를 얻어야 된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어머니는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냐며 늘 골방에서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노할머니를 잘 설득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부터 할머니는 더욱 심하게 어머니를 구박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듣기에도 거북한 욕을 하시면서
"네가 우리집에 들어와서 대를 끊는다"는 둥 "집안에 우환이 든다"는 둥
모든 안 좋은 일을 걸핏하면 어머니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할머니의 호령에 얼른 피했다가 들어오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숨죽이며 울고 계셨습니다.
저는 다행히 큰딸이라 자랄 때에도 귀여움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간호전문대학을 나와서 부산의 한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제 손목을 꼭 잡으시면서 "이제 네 갈 길로 떠나거라. 여기 동생들이랑 이 어미 걱정말고….
설마 할머니께서 어린 네 동생들이랑 나를 내치시가야 하겠느냐.
30년이란 세월을 살을 맞대고 살아온 너희 아버지도 계시는데 나 몰라라 하시진 않을게다.
그동안 큰딸로서 맘고생 많이 했다.
이젠 이곳의 생활은 잊고 부디 직장에 충실하거라"하시며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직장에 적응하느라 집 안일은 까마득히 잊고 지냈습니다.
5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젠 할머니도 나이가 많으셔서 전같이 어머니를 구박하시지 않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셋째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집안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요즘 어때?"
"그냥…."
"그냥이라니?"
"늘 그렇지 뭐."
시큰둥한 동생에게 다그치니 할머니가 몇 달 전에 쓰러지셨는데
중풍이 와서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는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못 쓰시고 말도 제대로 못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라도 방을 비우면 변 보신걸 이불이며 벽에 발라서
고초가 여간 큰 것이 아니고 또 변을 많이 보셔서 먹을 걸 적게 드리면
"저 년 혼자 다 먹고 나는 굶긴다. 집안 말아 먹는다"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오면
"손주녀석이 없어 저 세상 가서 조상님들 어떻게 뵐꼬"하며 마구 욕설을 퍼붓는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뜻밖에 어머니가 부산에 오셨습니다.
"어머니, 할머니는 어떡하구요?"
"둘째가 휴가 내서 집에 와 있다. 그리고 할머니도 많이 좋아지셨다.
생전에 딸자식이라고 있는 것 품에서 떼어놓고 근 6년만에 와보는구나.
무심한 이 어미를 용서하거라."
누구보다 어머니 처지를 잘 아는 내가 용서라니….
20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친정에서도 단 하룻밤을 보내지 못하신 어머니께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외박이라는 외박을 하시면서
"니 할머니는 잘 계신지, 둘째가 잘 하는지, 니 아버지 진지는 드셨는지, 막내 숙제는 다 했는지…."
걱정만 하셨습니다.
"어머니, 할머니가 밉지도 않으세요?
할머니께 그렇게 모질게 구박 받으시고도 할머니 걱정이시게."
"얘야, 그런 소리 마라.
원망이라니 당치도 않다.
너도 시집을 가게 되면 알겠지만 여자가 아들 못 낳는 죄만큼 큰 죄는 없다.
소박을 맞아도 몇 번은 맞아야지.
네 아버지 볼 면목이 없단다.
사실은 네가 사는 것도 궁금하지만 부탁이 있어서 왔다.
작은집을 보자니 너희 아버지 넘겨주는 기분이라 용기가 없고
그래서 병원에 아들만 전문으로 낳아 주는 그런 여자가 있다길래 왔다.
너는 간호원이니 잘 알지.
네 엄마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꼭 부탁하마."
어머니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간곡하게 사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 할머니는 연세 많아 몇 년 못 사실 건데 그때까지만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다소 엉뚱한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그저 한이 맺혀 그러시겠지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드렸지만 어머니는 자못 진지하게 말을 이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더 서둔다. 할머니 눈감으시기 전에 아들 안겨드리게 말여."
어머니가 내려가신 후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골방에서 우시던 어머니 모습,
나를 부산에 보내실 때의 모습,
그리고 부산에 오셔서 부탁하시던 모습들이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어머니 소원대로 하자.
아버지를 넘겨주시는 기분보다 배다른 자식을 키우는 게 어머니 속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자."
아버지를 설득해서 부산에서 1주일 정도를 머무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던 손주를 보지 못한 채 할머니는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리고 열 달 후 씨받이 여자는 아들을 낳았고,
가을 바람에 낙엽 날리듯 우리들 가슴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마치 겨울 눈이 녹아 내리듯 아주 자연스럽게…. 시골집 방에 눕혀진 아이를 보고 어머니는 또 말 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선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셨을 것입니다.
"배다른 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울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아이를 보면서 아버지의 외도 아닌 외도를 기억에서 지울 수 있을까?"
어미니께선 분명 우리 여섯 딸보다도 이쁘고 귀엽게 키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한 나는 결혼 한 지 꼭 1년 반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안고 온 내 아들을 안으시곤 대성통곡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북받쳐온 서러움을 한꺼번에 다 씻어 버리는 양 울고 또 우셨습니다.
"넌 어째 아들을 낳았노. 어째 아들을 낳았노!"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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