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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외로운 여행자, 미스터 리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96)

2011-02-17 03:40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했다.
우리는 하루에 4만 낍(6천 원 정도)하는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방비엥의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여행자 부부가 일정을 바꿔 방비엥의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것은 "미스터 리"로 통하는 그 사나이 때문이었다.

전날 밤이었다.
낮에 보아 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에 인사라도 할까 해서 찾아갔다가 주인장 대신 그를 만났다.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그는 깍두기 머리에,
용과 달마와 마야부인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의 어느 목욕탕에서 그를 만났다면 나는 조폭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조금은 움찔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 선 여행자는 영화나 드라마, 때론 존재했던 현실로부터도 자유롭다.
그의 몸에 새겨진 그림은 예사롭지 않았고, 푸르고도 아름다웠다.

한때 그는 한국에서 잘나가던 건달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 사건으로 원치 않게 태국으로 떠나와야 했고, 나그네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 후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지금 다 이야기할 순 없을 듯싶다.
지면도 짧고, 그에게 예의도 아닌 것 같다.

“친구, 내일 꼭 가야 하나? 내가 오리백숙 살게.”

알고 보니 그는 나와는 동갑내기였다.
길 떠나온 나그네가 "내일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그와 동행한 여행이 시작되었고,
지금 그는 양손을 어깨보다 더 넓게 뻗어 잔뜩 폼을 잡고선 우리 앞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도착한 곳이 "몽족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옥수수를 알알이 까서 대바구니에 널거나 베를 짜고,
아이들은 열을 지어 강물에 뛰어들며 놀고 있었다.
그 몸놀림들이 어찌나 싱싱하고 매끄러운지 어쩐지 구릿빛 돌고래 같았다.
마을 오솔길을 돌다 보니 제법 넓은 마당이 나왔다.
그곳에도 구릿빛 아이들이 있었고, 구멍가게가 있었다.
미스터 리는 동네 꼬마들을 구멍가게로 불러 처마에 매달린 과자봉지를 아이들 숫자대로 떼어 내고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다.

진즉에 알아봤지만, 그는 오지랖이 넓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마초 혐의의 여성 여행자를 쫓던 사복 경찰을 치한으로 여겨 혼내주려다 득달같이 몰려온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개구쟁이 라오스 아이에게 도시로 데리고 나가 놀이기구를 태워 주는 대신
엄마의 식당일을 도와주기로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는 것이 그였다.

저녁은 내가 사겠다고 했다.
돼지 볼살 숯불구이 두 접시를 앞에 두고, 그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기는 방비엥이 이상하게 좋단다.
그래서 한동안 살아 볼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면 한국여자와 하고 싶다는 것이다.

돼지 볼살 숯불구이를 몇 점 남겨 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그는,
 
“잘 가라, 또 보자고!”
 
단 두 마디로 냉정하게 돌아섰다.

외로운 사람들의 특징이다.
헤어짐에 단호한 것.
그들은 잘 아는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이들에게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란 추억으로만 남는 사진 한 장일뿐이라는 것.
이미 등을 돌려 저만치 걸어가는 미스터 리에게 소리쳤다.
 

“맛있었어~!”
“뭐라고?”
“맛있었다고, 오리백숙!”
 

그는 아아, 하더니 씨익 웃고는 두 손가락을 펴서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