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가게 이름은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유명상회입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께서는 그 유명한 유명상회 사장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선 거의 20여 년 동안 전기 그라인더 및 숫돌과 싸워가며 칼을 팔고 갈아오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제가 사는 동네에선 유명인사로 모르는 사람은 간첩으로 통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너 칼집 아들 아니니?"하고 아주머니들이 물어 오시면 "네"하고 큰소리로 대답했으며,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국민학교 졸업 앨범 뒤의 장래 희망 란에 "상업(칼집)"이라고 쓸 정도였습니다. 그걸 보시고 아버지께선 "이 녀석아! 아빠가 하는 일은 무척 힘들어서 너 같이 몸 약한 애는 못한다.
그리고 이 아빠는 너한테 이런 거 시키지 않을 게다.
알았어? 이 녀석아!"
하고 웃으셨는데 그때 저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아버지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세월의 강물을 타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동안 차츰 어렸을 때 자랑스럽고 멋있게만 보였던 그 일이
아버지께는 엄청나게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여름 숫돌조차 흐물흐물 해질 것 같은 땡볕 아래서 칼을 가시고,
엄동설한엔 연탄불에 올려놓은 세숫대야 물에 손 담가 가시며 일하시던 것은
우리 일곱 식구의 생계를 위한 고역 아닌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식구들이 많아
7살짜리 막내 동생부터 국민학교 3학년, 중3, 고2, 그리고 대학교 1학년인 저까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교육단계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수업료 내는 것만도 아버지께는 커다란 도전이십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2남 3녀 중 장남인 저는 그런 아버지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4년제 대학에 원서 내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선 "이 아빠가 칼 몇 자루만 더 갈고 전보다 조금만 더 뛰면 네 학비야 못 대겠니?"
하시면서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만 원이 넘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선 또 얼마나 많은 수의 칼을 갈아야 하는지,
그날 밤 그 칼자루를 세다 세다 저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아버지께서는 올해 들어 계속되는 불경기로
목이 좋은 가게 자리까지 남에게 넘기고 가게세가 좀더 싼 외진 곳으로 옮기셔야 했습니다.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아버지의 귀가시간은 그만큼 늦어지셨습니다.
게다가 올해엔 콜레라 때문에 많은 횟집이 장사가 잘 안되어
횟집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던 우리 가게의 수입은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떨어지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선 사업용 봉고차를 사시고 외지로 출장을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얼굴은 항상 피곤함이 배어있었습니다.
연세가 연세인 만큼 예전 같지 않은 체력으로 무리하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젊어 보이시던 아버지께선 근 몇 달 동안 갑자기 늙어버리셨습니다.
얼마 전 타지에서 하숙을 하며 대학에 다니고 있던 저는 오랜만에 집에 갔습니다.
집에 들어서다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시고 소파에서 곤하게 주무시던 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아버지의 얼굴이 마음을 쓰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소파 아래로 축 쳐진 아버지의 구릿빛 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들어 배 위로 올려드리다가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전에 아버지의 손을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망가져 있는 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숱한 칼을 갈고 취급해 오신 아버지의 짧지만 험한 역사가
그 손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총각이셨을 때 동네 아가씨들이 예쁘다고 그렇게 만져주었다는 그 손이
이제는 누가 봐도 과거의 그런 사실을 갖고 있던 아름다운 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유일한 존재로 구별해주는 지문이
검지와 엄지에는 단지 바깥쪽에 몇 가닥만이 보일 뿐 닳아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칼을 갈아오셨기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일까?"
하는 생각에 그만 내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말았습니다. 거의 빠짐없이 매일 칼을 갈게 되시니, 지문이 새로 나올 틈이 없으셨을 겁니다.
동생들에게 다 큰 오빠가 우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금방 화장지로 눈물을 닦을 수는 있었지만,
아버지께 너무나 많은 짐을 지워드리고 있다는 죄송한 마음은 어느 것으로도 닦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라고 그렇게 좋으셔서 20~30km되는 거리까지 걸어서 장사 나가셨다가도
어린 나를 보기 위해 다시 돌아오셨다는 아버지께,
장남으로서 힘이 되어 드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고
그동안 속만 썩여드렸던 내 자신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그날도 저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 만났다고 해서 노래방에다, 호프집을 들렀다 오는 길이었고
아버지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대학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겠다고 굳게 약속까지 해놓고서도,
학과 분위기에 휩쓸려 놀러나 다니고 공부도 등한시 했던 저였기에
두 번째 학비마저도 아버지의 몫으로 돌려야 했던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못난 자식을 위해 자신의 유일한 부분인 지문이 닳도록 헌신하시는 고마우신 아버지께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께 쑥스러워 그 흔한 말인 "사랑해요" 한번 말하지 못한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밤하늘에 수놓은 듯 펼쳐져 있는 미리내 앞에서 씩씩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실망시켜드리지 않고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리는 좋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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