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ID/패스
낙서 유머 성인유머 음악 PC 영화감상
게임 성지식 러브레터 요리 재태크 야문FAQ  
[퍼온글] 병아리 엄마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00)

2011-02-18 02:09

 

윙윙 불어대는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린다.
겨울밤은 참으로 길기도 하다.
벌써 여러잔째 커피를 마시고 잠을 좇지만 아직도 새벽 세 시,
날이 밝자면 앞으로 네 시간은 족히 남은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이 시간에
나는 한 시간에 한 번씩 계사안의 온풍기를 살펴봐야 한다.
자동온도조절기가 부착되어 저절로 돌아가는 온풍기이지만
혹시 기계가 고장나거나 멈춰버리면 영하의 기온속에서
어린 병아리들은 십여 분도 채 안 되어 얼어죽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이곳 선산에 자리를 잡고 양계장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째 접어들고 있다.
남편이 조그만 직장에 다니고 있던 오년 전,
그 해 덜컥 딸 쌍둥이를 낳아 줄줄이 딸 넷의 부모가 된 우리는 막막하기만 했다.
남편의 월급으로는 네 딸들의 교육비를 비롯해 시집보낼 때까지의 뒷바라지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듯 했다.
그래서 남편과 내가 둘의 힘을 모아 할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일도 수월하고 제법 수입도 좋다는 주위의 말을 듣고 덜컥 벌린 일이 바로 양계장이었다.

그간 모아둔 돈과 여기저기서 빌린 돈으로 축사를 사서 올망졸망한 딸들을 앞세우고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도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당시엔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과 미래에 대한 꿈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다음날부터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계사는 온도유지가 가장 중요했다.
손이 덜 가는 석유온풍기나 가스열풍기가 있었지만 가격이 워낙 비싸 감히 써볼 엄두도 못내고
사십 개의 연탄난로를 구입하여 그것으로 대신하였다.
연탄으로 계사내의 온도를 20。~30。씩 유지시키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연탄가는 일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두툼한 실장갑 두 켤레를 물에 축축하게 적셔서 그걸 끼고 연탄을 갈았는데
어찌나 그 열기가 뜨거운지 축축한 장갑은 어느새 금방금방 말라 연신 물을 적셔야 했다.
그렇게 사십 번째의 난로를 갈고 나면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맨 처음 갈았던 난로의 연탄을 다시 갈아야 했다.

그 뿐 아니었다.
연탄재의 남은 열부스러기가 깔짚에 옮겨 붙을까봐
조심하느라 어깨가 뻐근할 만큼 긴장, 또 긴장해야 했다.
연탄재 치우는 일은 남편 몫이었는데 그것 역시 중노동이었다.
난로 하나에 6장씩, 40여 개의 난로를 다 보살피자면 백여 장의 연탄을 하루저녁에 다 사용했다.
축사 옆엔 늘상 허연 연탄재들이 산처럼 쌓였고 그걸 치우느라
남편은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했다.

이러다가 우리 부부 쓰러지고 말겠다 싶은 생각에 큰맘먹고 큰돈을 들여 자동온도조절 온풍기를 설치했다.
그것만 있으면 밤새도록 쿨쿨 잠을 자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온풍기를 설치하고 난 며칠 후 축사에 나가보니 병아리들이 한덩어리로 뭉쳐 죽는 일이 벌어졌다.
온풍기가 갑자기 멈춘 것이다.
닭은 성질이 여간 급한 것이 아니어서
조금만 추워도 그만 죽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우린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뒤 남편과 나는 밤이 되면 번갈아 계사를 살펴봐야 했다.
연탄난로나 온풍기나 잠 못자기는 매한가지였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아, 내 닭!"하며 내의바람으로 닭장에 뛰어나가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했다.
여름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겨울과는 반대로 계사를 시원하게 유지시켜야 했기에 끊임없이 선풍기를 돌렸다.
선풍기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만큼 무더운 날이면 계사 바닥에 쉴새 없이 물을 뿌리곤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 두 해는 수백만 원씩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 두 부부의 모든 것과 네 딸의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계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편과 나는 이를 악다물고 몇 해만 참고 마치 내 자식 대하듯 닭을 키워보자고 했다.

우리 부부는 고단함과 절망속에서 점점 수천 마리의 병아리 엄마, 아빠가 되어갔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를 들여오기 전 계사 주위를 청소하고 소독하면서 깔짚을 정돈할 때면
내 마음은 아기를 잉태한 임산부의 경건한 마음과 같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화장의 운반차량에서 병아리 상자를 내리면서
나는 "열심히, 정성껏 키워보자"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병아리들이 먹을 첫물은 인삼물 혹은 설탕물, 아니면 영양제 등을 녹인 물을 찍어먹게 했고
첫모이는 신생아인만큼 아주 소량을 물반죽하여 조심조심 흩뿌려주었다.
그러면 네 딸들이 엄마, 아빠를 돕겠다고 모이통을 빼앗아 모이를 뿌려주자
병아리들이 아이들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삐약삐약 울어대는 노오란 병아리를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딸아이들의 모습에
우리 부부는 잠시 피곤을 잊기도 했다.

반죽사료에서 가루사료를 먹이다보면 노오란 털뿐이던 병아리의 몸뚱아리에
삐죽삐죽 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기에 접어든 이 시기도 조심해야하긴 마찬가지이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철망을 빠져나와 여기저기 신나게 도망다니기 때문이다.
우왕좌왕하며 도망가는 닭을 잡느라 진땀을 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병아리 키우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가끔 한 병아리가 깔짚사이에 낀 빨간 색종이 조각 같은 걸 물면
그 옆의 병아리가 빼앗아 달아나고 그 뒤를 쫓고 쫓기며 십여 차례 주인이 뒤바뀌며
대이동이 벌어진다.
어떤 병아리들은 한쪽 구석에 있다가 왜 그런 소동이 벌어졌는지 모르면서
군중심리에 휩싸여 밀물같은 움직임에 휩쓸려 덩달아 뛰어가는 것이다.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병아리와 울고 웃기를 5년째,
이젠 병아리, 닭의 거동만 보아도 그놈들이 무얼 느끼고 원하는지 알 정도가 되었다.
기반도 웬만큼 잡혀가고 있다.
또 우리 네 딸들도 훌쩍 자라 중학생, 초등학생이 되어 한결 시름을 덜게 되었다.

그간의 일을 쓰다보니 새벽 네 시가 가까워온다.
또 닭장에 한 번 다녀와야겠는데 가기 전에 아이들 방을 먼저 둘러봐야겠다.
아이들의 자는 얼굴을 보면 그 어떤 힘든 일도 이겨내리라는 각오가 새롭게 다져지곤 한다.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나 멀리 동이 터올 무렵 꼬꼬댁 하고 제일 먼저 새벽을 깨우는 수탉처럼
씩씩하게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스르르 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