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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세 분의 어머니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81)

2011-02-19 00:36

 


제겐 세 분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저에게 세상의 빛을 보게 해주신 어머니,
저를 냉정하게 버린 새어머니,
그리고 버려졌던 저를 큰 사랑으로 보듬어주신 양어머니….

제가 여섯 살이 채 되기 전에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까지는 비교적 오손도손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새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매일 큰 소리로 다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와 싸우던 새어머니가 크게 화를 내며 소리치셨습니다.

“저 애를 고아원에 보내지 않으면 내가 나갈 거예요.”

그날 정말로 집을 나갔던 새어머니는 일주일 뒤 새옷과 새신발, 새책가방을 사가지고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곤 저를 낯선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서 부잣집에 보내는 거야.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라.”

전 떼를 쓰고 울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분들은 저를 귀여워해 주셨지만
그 집의 사업이 망해 다시 새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새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저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있는 앞에서 때리고, 야단치고, 심지어는 학교에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학교에 가겠다고 울며 졸랐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술만 드셨습니다.
아마도 새어머니가 임신을 하고 계셨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는 점점 말이 없고 이리저리 눈치만 보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갔습니다.

얼마 후 저를 딱하게 여기던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들은 다 커서 객지로 나가고 시골에 혼자 외롭게 지내는 작은 어머님이 계세요.
거길 한번 알아볼까요?”

잠시 망설이던 아버지는 그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눈물까지 보이며 아주머니께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엔 옆집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제가 다시 "엄마"라고 불러야 할 분은 많이 늙으셨고, 집안 형편도 넉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따뜻한 미소로 저를 맞아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주셨습니다.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분은 쉽게 저를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 거지요.

새로운 양어머니는 5일마다 장이 서면 장터에서 국밥과 막걸리를 팔아 생활을 꾸려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제 등록금 날짜는 한번도 어기지 않으셨고,
불편하신 몸으로 새벽밥을 지어 먹이며 "가난해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좀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셨는지
남의 집 농사일에 품을 팔러다니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양어머니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던 저는 선생님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산업체 특별고등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저녁때는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적은 월급이지만 꼬박꼬박 양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양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를 맡았으면 고등학교까지라도 내가 보내야 하는 건데"
 
하고 미안해 하셨습니다.

"어째서 난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왜 나를 버리셨는지,
왜 나만 이렇게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갈등도 많았지만 양어머니의 주름지고 거친 손을 보면서 외로움과 분노를 속으로 삭였습니다.

대학진학의 뜻을 버릴 수가 없어 시험이라도 쳐보자는 마음으로 입시를 치렀으나
결과는 예상대로 낙방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저를 양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웃음으로 맞아주시며 꼭 안아주셨습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펑펑 우는 제게 양어머니는 꽤 많은 금액의 돈을 내미셨습니다.

“네가 어떻게 번돈인데 내가 마음대로 쓰겠니. 3년간 모았더니 제법 커졌구나.”

저는 양어머니 앞에서 한번 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후 전 간호전문대에 들어가 병원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날 병원으로 아버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15년만의 재회였습니다.

“새어머니도 이제 많이 늙었다.
예전처럼 독하지도 않고, 동생도 많이 자랐다.
집안 형편도 많이 나아졌으니 같이 살자!”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난날 받았던 상처들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절실히 필요할 때는 내다버리고 이제 다 커서 사회적인 능력이 되니
찾아오신 아버지가 더욱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원망스러운 만큼 그리움도 컸기에 갈등도 많았습니다.

며칠 후, 한번 내려오라는 양어머니의 전화가 왔습니다.
선물을 한아름 사들고 간 제게 양어머니는 나즈막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젠 나도 많이 늙어서 큰아들하고 같이 살아야겠다.
그러니 너도 네 아버지께 가거라….”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다녀가셨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양어머니께 매달리며 말했습니다.

“엄마, 제겐 엄마밖에 없어요.
이제껏 저는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전 엄마 딸이고 앞으로도 그건 변함없어요….”

“그래 넌 내 속으로 난 내 딸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두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맡겨진 저를 따뜻한 마음으로 거두어주신 어머니는
저를 아버지께 보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는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시 몇 해가 지나고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 남편도 양어머니를 친장모님 이상으로 모시고,
양어머니의 집안에서 저는 막내딸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많이 늙으셨지만 인자하시고 사랑 가득한 마음은 여전하십니다.
나쁜 길로 빠져들 수 있었던 제게 마음의 지주가 되어 언제나 든든하게 지켜주셨던 어머니,
어머니는 누구보다 제 맘을 잘 아실 겁니다.

“엄마, 사랑해요. 하늘만큼 땅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