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태어난 곳은 경남 밀양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늦동이인데다 막내인 저를 무척이나 귀여워 해 주셨고,
저는 참 순한 아이였습니다.
비록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까지 밖에 졸업을 못했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 소문이 나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는 동네 분들의 주선으로
이웃에 사는 참하고 예쁜 아가씨와 혼인까지 올렸습니다.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천사처럼 보였고
저는 장차 태어날 아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조금도 한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생활하였더니
결혼한 지 십 년 정도 지나자 돈이 조금 모였습니다.
논도 몇 마지기 생겼었구요.
그동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이 너무나 귀엽고 예쁜 딸자식도 하나 얻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아이를 보면 행복했고
그럴 때마다 절대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하루일을 끝내고 동네 친구들과 읍에 나가
막걸리를 한 잔씩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몸은 몹시 고단했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읍으로 나갔습니다.
읍에는 못보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한 친구가 서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라며 내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인사만 하고 몇 잔 들이키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다음날 읍에 나가니 그들 중 한 명이 꽤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고
사람이 좋아보이는지라 금방 말도 놓게 되고 아주 친해졌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그 친구가 저에게 재미있는 데를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들이 노름 비슷한 것을 한다는 말을
동네 사람들한테 얼핏 들은 적이 있던 터라 혹시 그런 곳이 아닌가 싶어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친구는 더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나에게 와서는 어떤 내기에서 삼천 원을 투자해
이십만 원을 벌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궁금해진 저는 어떻게 그런 돈을 벌었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오늘 저녁에 가보자고 말했습니다.
순간 이런 것에 빠져서 패가망신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생각났지만
삼천 원 정도야 어떠랴 싶었고 만약 잃는다면 푼돈 잃어버린 셈치고
거기서 손을 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와 아내 생각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미 도박에 대한 호기심이 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난 뒤였습니다.
그 남자와 함께 들어간 곳은 읍내의 후미진 골목 끝에 있는 작은 골방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언뜻 보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카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저를 데리고 온 그 남자가 하는 것을 보기만 했는데
오천 원을 걸더니 이내 오십만 원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조금만 배우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날 저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이튿날 저녁부터 당장 그 사람들과 합류해 본격적으로 도박에 빠져 들었습니다.
십 년이 넘게 농사일만 하면서 한푼 두푼 모아온 촌사람에게
푼돈으로 단시간에 그렇게 큰 돈을 만지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유혹이었습니다. 첫날과 둘째날에는 몇 푼 땄지만 세째날부터는 완전히 파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본전은 물론이고 여분으로 가져간 돈까지 모자라 옆에 있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까지
돈을 빌리고 또 잃고 또 빌리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돈은 자꾸만 잃게 되었고
아내와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도박에서 손을 못떼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미칠 것 같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점점 신경질과 짜증만 늘어났고 제가 자꾸만 돈을 요구하며
나중에는 아예 통장을 가지고 다니자,
아내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듯 싶었지만 저에게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노름으로 인한 빚까지 늘어났고 말려도 듣지 않는 저를
보다 못한 아내는 홧병으로 자리에 눕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노름꾼들은 제가 더이상 걸 돈도 없고 이제 이 동네에선 장사가 끝났다 싶었던지
몇 달 후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전문 도박꾼들이었고
그때는 이미 저 때문에 온 집안 식구가 알거지가 된 후였습니다.
가엾은 아내는 약한 몸에 몇 달을 더 앓다가 끝내는 숨을 거두었고
여덟살 난 딸아이만 엄마도 없이 불쌍하게 남았습니다.
가슴을 쥐어뜯고 땅을 치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난 뒤였습니다.
땀과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벌려고 했던 저의 일시적이었지만
잘못된 욕심에는 몇십 배가 되는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생각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습니다.
앞으로 미래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하나 밖에 없는 딸 영현이가 있었고,
그애가 저를 바라보는 별처럼 맑고 순진한 눈빛을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애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와서 사글세방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안해본 일 없이 주어지는 일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했고
남들이 지독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식당 배달원, 공장, 청소부, 가게 짐꾼 등을 거쳐
지금은 공사장에서 잡부 노릇을 하는데
제 딸아이는 벌써 꽃다운 나이 열여덟의 예쁜 여고생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나가느라 잘 챙겨주지도 못했건만
어렸을 때부터 투정도 안 부리고 늘 혼자서 해내며 아버지 생각만 하던 기특한 아이였던지라,
다 자란 지금에도 제가 퇴근하는 시간에는 늘 동네 골목 입구에 나와서 기다립니다.
이제 저는 아무런 욕심도 걱정도 없습니다.
그저 그 아이가 행복하게, 순탄하게 살게 되기를 바랄 뿐이고
혹 인생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거름삼아
포기하는 일 없이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는 정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땀 흘려 일한 만큼의 행복이 진정한 재산이라는 것을 영현이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에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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