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돌개를 보러 가자며 외돌개에 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외돌개를 보러 가자고 하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외돌개만 보려 합니다.
외돌개 가는 길의 경치도 외돌개 못지않은데 말입니다.
외돌개를 보러 가는 길에는 범섬이 보이고,
문섬도 보이고,
섶섬도 보이고,
지귀도도 보입니다.
그리고 멀리에 있는 가파도와 마라도도 얼굴을 내밀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제주 곳곳을 살피며 가야 하는 것이 외돌개를 보러 가는 방법입니다.
외돌개는 가파른 해안 절벽을 타고 가면 나타나는데,
외돌개 근처에는 옛 양어장 시설이 있어서 천연 목욕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천연 목욕탕은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져 있어서 제주의 숨은 비경 중 하나입니다.
물론 외돌개 주변의 주상절리도 구경거리에서 빼 놓을 수는 없습니다.
외돌개를 처음 본 사람은 힘차게 솟은 바위에서 남성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돌개에 얽힌 전설은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방(할아버지)이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할망(할머니)은 매일 밤낮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하루방은 돌아오지 않고,
며칠이 지난 후에 하루방은 죽어 물 위에 뜬 몸이 되어 할망에게 왔습니다.
그 순간 할망은 바위로 굳어 외돌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전설이 있습니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제주에 왔는데,
범섬으로 도망을 간 목호들의 기세가 높아 쉽게 제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꾀를 쓴 것이 외돌개를 최영 장군의 모습으로 꾸민 것입니다.
그러자 범섬에 있는 목호들이 그 기세에 눌려 모두 자결을 했다고 합니다.
외돌개와 범섬에 얽힌 싸움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승리자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제압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그 당시 제주 도민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또 사뭇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에 의해 탐라국이 사라진 뒤부터 제주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원나라의 침입에 항거하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던 삼별초를 기억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삼별초는 외세에 끝까지 항거한 애국자들입니다.
하지만 제주 사람에게도 그런 모습이었을까요?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려 할 때,
제주의 관군들은 삼별초를 막기 위해 제주도민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환해장성을 쌓았습니다.
섬 전체를 하나의 성으로 두르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삼별초의 세력이 더 강해서 제주는 결국 삼별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사실 제주 사람에게는 관군도 삼별초도 원의 군사도 지배자이고 착취자였을 뿐입니다.
지금도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방의 사람들을 "육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육지 것이라는 말이 육지에서 온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육지 것" 속에는 무수한 외침을 받아야 했던 제주의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제주 사람들에게는 백제도, 신라도, 고려도, 삼별초도, 원나라도, 왜도 모두 외세였고,
거기에서 온 사람들은 다 "육지 것"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이나 왜나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제주의 역사는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소수자의 아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외돌개를 보면서 외돌개만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어느새 제주의 역사와 제주의 한이 제 몸에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디 외돌개 뿐이겠습니까.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는 역설처럼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제주 여행을 할 때는 단순히 볼거리를 보는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주를 깊게 보는 것만이 제주를 사랑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