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면 저는 신문보급소 지하실에 있던 연탄난로가 생각납니다.
언 몸을 녹이기엔,
한밤의 추위를 이기기엔 그 연탄난로의 열이 너무도 미약했지만
그나마 그것으로 인해 따뜻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저는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한식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어린시절을 지극히 평범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하시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은 갈수록 심해졌고,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어느날 홀연히 집을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누나에게 학교 가지 말고 엄마 대신 식당이나 보라며,
울면서 학교에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누나를 심하게 꾸짖고 때렸습니다.
그러다 얼마 뒤 3남매는 아버지에 의해 큰집에 떠맡겨졌습니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던 큰집에 얹혀 살며 우리들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새엄마다. 인사해라.”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오신 아버지께서는 그 말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보고 싶지 않았냐고,
그동안 왜 한 번도 안 찾아 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새엄마와 함께 성큼성큼 가버리시는 아버지를 쫓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엉겹결에 생긴 새엄마에게 선뜻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새엄마는 또 갈수록 우리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저는 새엄마가 "콩쥐 팥쥐"에 나오는 계모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얼마 후 새엄마의 모진 학대와 아버지의 계속되는 술주정과 폭력을 견디다 못한 우리들은
그 어딘들 지금만 못하랴라는 심정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누나는 장사를 한다고 떠나고 형과 저는 신문보급소를 찾아갔습니다.
신문보급소 소장님은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어린 우리들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열심히 하거라. 어려운 일 있으면 날 아버지라고 생각해서 그때 그때 얘기하고…….”
하시며 우리들의 손을 꼬옥 잡아주셨습니다.
새벽잠을 설치며 신문을 돌리고, 이른 아침엔 도로에서 신문을 팔기도 했습니다.
오후에도 쉬지 않고 신문을 돌렸고 차가운 지하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굶주린 배는 라면으로 채웠습니다.
불어터진 라면도 없어서 못 먹을 때였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목놓아 울며 죽을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형은 아무 말 없이 저를 힘껏 안아 주었습니다.
실컷 울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맘 때 친구 한 명이 보급소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 친구는 고아원에서 구타를 못 견디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공부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였습니다.
우리 셋은 새벽부터 오후까지는 신문을 돌리고
밤에는 죽을 힘을 다해 중학교 졸업 검정시험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제일 부러워 했던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었습니다.
책가방을 매고 도시락 들고 등교해선 공부만 하는 학생 그 자체가 제일로 부러웠습니다.
신문을 돌리다가 그런 학생들을 보면 가끔씩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그 덕분에 우리 셋은 나란히 중학교 졸업 검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도 합격했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당당하게 우리 힘으로 했노라고 말입니다.
그 즈음, 누나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방이나마 얻어 7년만에 함께 모여 살게 된 우리는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했습니다.
누나는 공장에서, 우리는 신문보급소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형은 제 친구와 제가 하루종일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누나와 함께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말입니다.
형은 자신도 그렇게 대학에 가고 싶어했으면서도
제 친구와 제 앞에서는 원래 자기는 대학 갈 마음이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형의 마음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학원에서 칠판을 닦아
수업료를 면제받으며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어버이날이었습니다.
늘 엄마처럼 보살펴주는 누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날 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12시쯤 집에 들어갔습니다.
누나는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면서도 여느 때처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카네이션 대신 준비한 장미꽃 한 송이와 편지를 건네주자 누나는 울더군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보란 듯이 꼭 대학에 합격해서 우리 누나를 기쁘게 해 줘야지…….”
결국은 그 이듬해 그렇게도 바라던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친구와 나란히 말입니다.
지금 저는 대한의 군인으로서 푸른 제복을 입고 인천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휴학해서 군대에 와 있는 동안 친구는 모범우등생으로 벌써 4학년 졸업반이 되었고
대기업 특채에 합격해 졸업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형은 군대를 다녀온 후 일하면서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잘 할 거라고 믿습니다.
누나가 조금 걱정입니다.
우리 때문에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누나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다"는 말이 있죠.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열의만 있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많이 모자란 글이지만 힘든 생활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을 좋은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구요? 사랑하는 누나와 형과 친구가 늘 곁에 있으니까요.
그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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