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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스물한 번째 이사를 하고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50)

2011-02-23 17:08


 
어젯밤 늦게까지 싼 짐을 아침 일찍 일어나 차에 싣고 나르다 보니 무척이나 피곤하다.
내가 숫자를 셀 수 있었던 나이에서부터 지금까지 곰곰이 되짚어보니
이번 이사가 스물한 번째인 듯싶다.

나는 두메산골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네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누나들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버려 시골엔 어머니와 형과 나만 남게 되었다.
그즈음 어머니께서는 밭농사도 잘 안되고 혼자하려니 벅차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또 형과 나의 존재가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주기엔 너무 미약했는지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재혼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를 따라 새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전기불과 말로만 듣던 텔레비젼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 마냥 좋아했다.

그러나 새아버지는 처음엔 안 그러시더니 얼마쯤 지나자 술을 자주 드셨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나를 때렸다.
일 년여 동안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어느날 서울 가서 돈 번다며 우리 곁을 떠났던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와 나는 새아버지와 헤어져 서울로 갔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있는 한남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새 학교에 겨우 적응할 즈음 형이 일하던 식당을 그만두는 바람에 다시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옛날에 살던 집에서 조금 떨어진 부여에 사글세 방을 간신히 얻었다.
그런데 1년도 안되서 어머니가 주인집 아주머니와 크게 싸우는 바람에
우리는 그 집에서 쫓겨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몇개월 살다가 그 근방에 있는 빈집으로 다시 이사를 갔다.
하지만 3년쯤 지났을 때 그 집 주인이라고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더니
얼마 후 그 집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또 이삿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여덟번이나 이사를 했다.
나는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하면 핑계거리를 대서 못 오게 했고,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신다고 집이 어디냐고 물으실 때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학비를 대기 위해 어머니는 시골에 있던 밭을 파셨다.
그 돈으로 학비를 내고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짜리 집을 전세로 얻어 이사했다.
형은 직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어 그 집에서 어머니와 나 단둘이만 살았다.
2년쯤 살았을까.
주인이 전세금을 올려 우리는 더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고3이 되자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은 애초에 포기했다.
그저 빨리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월급을 받던 날에는 돈을 모아 집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돈이 없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 집 구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집 없는 서러움에 몇번씩이나 눈물을 삼켜야 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열심히 저축했고 집안 살림도 하나 둘씩 장만해 나갔다.
전화를 놓았고 TV를 샀고 가스렌지도 샀다.
전세금도 올려달라는 대로 올려줘가며 살 수 있었다.
정말 오랫만에 맛보는 안정과 행복이었다.
입영영장이 날아와 군에 입대하게 되었을 때도 어머니를 혼자만 남겨놓는 것이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사할 걱정은 없으니 그나마 마음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첫휴가를 나와 집으로 달려가보니 얼마 전에 주인이 집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어머니께서는 그 근방으로 집을 옮겼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가 이사한 집은 방도 좁고 연탄가스에 중독될 위험도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런 집에 어머니를 남겨 놓고 부대에 복귀하려니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어머니는 우리가 챙겨드릴테니 걱정말라고 하셨다.
복귀한 뒤에 나는 어머니께 편지를 쓸 때마다
"어머니, 2년만 참고 기다리세요. 제대하면 돈 많이 벌어 집도 사고 어머니 편히 모실게요."
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제대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
그런데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이사를 해야 했다.
주인이 여관을 짓는다고 살던 집을 헐게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한테 돈을 빌려서 그럭저럭 다른 전세집을 얻어 살고 있는데
형이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왔다.
형은 다른 직장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한테 돈을 달라고 했다.
쓸 돈이 모자라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린 용돈마저 빼앗아 썼다.
나는 그런 형이 미웠다.
참을 수가 없어 몇 번 형과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그
러자 주인이 애들 공부하는데 방해되니 방을 빼라고 했다.
"방 빼라"는 소리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다시 사글세방으로 옮기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중풍으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많은 병원비를 다 감당해내지 못해 방세가 육개월이나 밀리게 되었다.
주인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당장 방을 비우라고 했다.
정말 왜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는 걸까.
막막한 마음에 그날 나는 서러워 한참을 울었다.
언제부터인가 참고 참아온 울음이었다.

나의 딱한 사정을 들은 친구가 자기가 아는 빈집이 하나 있는데
그 빈집을 고쳐서 살면 어떠겠냐고 했다.
시골에 외진 곳에 있는 그 집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폐가가 되어 있었으나
잘만 고치면 그런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배운 보일러 기술, 전기 기술, 건축 기술을 총동원하여
몇날 며칠을 매달려 그 집을 말끔하게 고쳤다.

주민등록증이 꽉 차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록 이사다니면서
서럽고 창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 없는 서러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지…….

어머니를 볼 때마다 늘 죄송한 마음 뿐이다.
혼자서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고생만 하신 우리 어머니!
집주인 눈치만 보며 큰소리 한번 못내고
이사할 때마다 형과 나를 꼭 안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께 나는 열심히 돈을 벌어 번듯한 집을 마련해 드리고 싶다.
나는 이 소망이 꼭 이루어질 수 있도록 땀흘려 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