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8세의 아줌마입니다. 세차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복권을 삽니다.
복권을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 샀습니다.
역시나 꽝이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하며 돌아서지만 속상해집니다.
저는 불행이라는 것에 익숙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병마와 씨름했는데 한쪽 눈이 잘 안 보이고
만성중이염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병신이라고 놀리면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그저 숨죽여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스무살 때 육촌 언니의 도움으로 고향인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돈을 벌어 병도 고치고 공부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의 남편에게 반강제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부모님이 강제로 시킨 결혼이지만
결혼하면 행복할 거란 막연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집와서 보니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척추를 다쳐 13년째 앉은뱅이로 살고 계시는 시어머님이었습니다.
농이 심해 환부를 매일 닦아드려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도 언제나 제 몫이었습니다.
신혼생활의 단꿈이란 꿈도 꾸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저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첫번째 아이를 가진 뒤 몸이 무거워 시중드는 일이 더 힘들어지긴 했어도
게을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님의 증세는 차츰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결국 시어머님은 첫손주가 태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시더니 그 다음날 바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금방 해산을 한 터라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장례식을 치르는데 누워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누워있는 게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장례식을 치러낼 사람 또한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외로워하시는 시아버님을 보면서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이발도 해드리고 수염도 깎아드리고
목화솜을 넣어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끝내 시아버님마저 뜻하지 않은 중풍으로 4년 동안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유달리 저를 끔찍이 아껴주셨던 시아버님이었기 때문에
시아버님의 죽음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추석, 시동생 한 분마저 집으로 추석을 지내러 오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서른두 살이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동생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집안이 어수선한 틈을 타 동서는 딸 셋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도망간 동서를 원망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조카 셋까지 합쳐 팔남매를 키워야 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조카 셋까지 함께 키우자니 집안 살림은 더욱 쪼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어둡기만한 집안 분위기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화병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열 번도 넘게 병원에 입원했고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불행은 그것에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 남편은 경운기 사고로 다리를 다쳐 아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뒤로 10년을 계속 병석에 누워 살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작년 1월 22일, 아직도 저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직장에서 돌아와보니 남편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남편이 꼼짝 못하고 집에 누워 심한 술주정을 부리면 화도 많이 났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그이밖에 없었기에 남편의 죽음은 저에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여보, 말 좀 해봐요. 어떻게 나를 두고 혼자 갈 수 있어요? 지금 당신 나를 놀리는 거죠? 그렇죠?"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울분이 한꺼번에 치솟아 올랐습니다.
남편을 묻은 묘지에 가서 추운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이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울고 나서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는 큰아들 내외와 첫손자까지,
살아있는 우리 식구 일곱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습니다.
살려고 마음먹으니까 못 살 것도 없더라구요.
그럭저럭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이번에는 조카딸이 동맥을 끊어 자살하려는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제 아비 죽고, 제 어미 도망가버린 뒤에 불쌍하다고 거두어 들여 7년 동안 고이고이 키워놨더니
고작 보답이라고 하는 게 자살소동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다.
내가 등이 휘어지도록 일하고,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너희들에게만은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밥 제대로 먹이려 했다.
떠나간 네 어미 못지 않게 잘해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못된 것…….”
조카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왜 지난 세월은 이처럼 힘들기만 했는지…….
남들처럼 조그마한 행복의 추억 하나 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따져보고 싶습니다.
갱년기 장애로 점점 더 안 들리는 귀, 희미해져만 가는 한쪽 눈.
이런 상황이지만 계속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세차장 일이구요.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낸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어갑니다.
이놈의 기구한 팔자는 언제쯤 풀리려나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납니다.
그래도 그런 아픔을 참고 나에게도 웃을 수 있는 날이, 행복한 날이 오리란 희망을 갖고 살 겁니다.
번번이 "꽝"인 복권을 고르면서도 또 다시 복권을 사는 것도 다 그런 기대, 희망 때문일 겁니다.
퇴근길에 복권을 하나 더 살까 하다가 첫손자 생각이 나서 따끈따끈한 붕어빵을 사들고 왔습니다.
무척 좋아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니 저도 오늘 기분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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