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서 고학을 하던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친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언니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야간 상고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혼자 돈을 벌며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제가 너무나 하고 싶던 공부였기에 열심히 하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펜팔은 많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펜팔을 하면서 힘든 생활을 견디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함께 생활하던 후배가 펜팔을 해보고 싶은데 자기는 편지를 잘 못 쓰니까 자기 대신 편지를 써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세 번 대필을 해주었는데,
그 후배가 자기는 편지 쓰는 것이 영 자신이 없으니 저더러 계속하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분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 뒤부터는 후배 이름이 아닌 제 이름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생활에 찌들어 힘겨워 하는 저를 걱정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저는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여 부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새로운 직장 생활을 축하한다며 제 이름이 박힌 도장과,
김남조 시인의 "가난한 이름에게"를 낭송하고 "울고 있나요"를 직접 불러 녹음한 테이프를 함께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그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 들으면서 그분의 따뜻한 마음을 새삼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의 친구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그분께 편지로 청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 친구는 그분이 국민학교 육학년 때 갑자기 다리가 마비가 오기 시작해서 이제는 하체가 마비되어 버린 장애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청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더군요.
친구를 통해 그분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너무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습니다.
목사님과 상담도 해보고 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저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그분을 외면해선 안되겠지만 갈수록 저는 그분의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는 동안 그분은 저와 연락을 끊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버렸습니다.
자신이 떠나는 게 저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는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한참 고민하다가 그분을 잊기로 했지만,
그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편도 그다지 건강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결핵을 앓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분과 나누지 못한 사랑을 남편과 나누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남편에게 그분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남편은 그런 고마운 분을 모른 체하고 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옛날 주소로 편지를 했는데 2년만에 엽서가 왔습니다.
그 동안 충주에 있는 재활원에서 전자제품 수리 기술을 배웠다는 내용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곧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그 동안의 얘기를 들으시고는 저에게 계속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가끔 삶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분께 전화를 걸었고
그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당시 제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축산업에 실패한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몸져 누웠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게도 귀여운 아이들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다 보니 제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란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삶에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그 동안 미뤄왔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른넷이란 나이에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했습니다.
예전에 다녔던 고등학교는 정식으로 문교부 인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를 다시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독학으로 공부를 한다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그분의 적극적인 후원과 격려 덕분에
저는 지난 94년 4월 17일에 전과목 합격이라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하고 남편과 함께 그분에게 얼른 연락을 했습니다.
“우리 인석이 저 하늘나라로 갔다네. 자네가 합격했다는 것을 알면 누구보다도 기뻐할 사람인데…”
그분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제가 검정고시를 보던 날 그분은 머나먼 하늘나라로 가 버린 겁니다.
그 동안 하체 마비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텐데
단 한번도 짜증 내지 않고 변함없이 저를 응원해 주던 그분이 생각나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 뒤 저는 방송대 유아교육학과에 진학했고 올해 삼학년이 되었습니다.
글 쓰는 데는 도통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저에게 생활 자체가 수필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던 분.
그분은 작가 지망생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경력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그분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를 졸업하면 문학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생활에 매여 15년 동안 얼굴 한번 뵙지 못하고 그분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죄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습니다.
4월이 오면 그분이 더욱더 생각납니다.
어딘가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그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