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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고통 속에서 퍼올린 희망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33)

2011-02-26 10:13

 
 
95년 4월 3일,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앰블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가 갑자기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을 일으키시는 바람에 급히 구급차를 불렀던 것이다.
나는 병원으로 가는 내내 두려움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으로 온몸을 떨어야 했다.
정신을 잃은 어머니를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병원에 실려 간 뒤 50일이 지나서야 깨어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더 이상 옛날처럼 다정하고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차분한, 그런 분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치매 증세와 비슷한 행동들을 하면서 자꾸만 과거의 아련했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때로는 허공을 바라보며 연신 웅얼웅얼거리시는 게 마치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머나먼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방향 감각도 없으신데 자꾸 몸을 여기저기 움직이시는 바람에 오빠와 내가 항상 어머니 곁을 지켜야만 했다.
또 어머니는 대소변도 스스로 가리지 못했기에 내가 기저귀를 채워 드리고 갈아 드려야 했다.
뇌출혈이 가져다 준 상처는 그렇게 심각했다.

어렸을 적에 나는 곧잘 어머니에게 “엄마, 난 나중에 커서 시집 안 가고 엄마랑 평생 살 거야”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나날이 지쳐 갔다.
어떤 때는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러고 있지는 않을텐데"라는 생각에 어머니가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특히 96년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 나는 어머니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대학에 갈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대학 입학은 나에게 있어 지난 6년 동안 매일매일 나 자신과 싸우면서 기다려 온 결실이었다.
더구나 나는 그림을 그려서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어머니의 병으로 6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내가 쌓아 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 살 차이인 오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엄청난 고통이 찾아와야 하는가.
나는 세상을 참 많이 원망했다.
그때 우리 집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수술비만 해도 천여만 원이 넘었다.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집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갈수록 문병 오는 친척들의 발길도 뜸해졌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도움을 구해도 모른 척했다.

“할 말은 아니지만 나머지 식구들도 살아야지.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 모른다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데리고 있으면 뭐 하겠나.”

친척들은 그렇게 빙빙 돌려 말을 했지만 그것은 어머니를 내다 버리라는 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어머니를 버린단 말인가.
몸도 성치 않은 어머니를….

그렇게 일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돈이 없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지내야 했다.
아빠와 오빠는 돈을 벌고 나와 어머니는 서울 이모댁에서 기거했다.
아무리 이모라지만 남의집살이가 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와 같은 병은 아니었지만 이모부도 정신병을 앓다가 돌아가셔셔
이모에게 어머니는 싫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하루는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는데 친척들이 모두 모여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을 터트리는 친척들의 목소리에 눌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어쩌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되었을까.
나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서 더 이상 탈 것도 없었다.

며칠 뒤,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경북 울진으로 가셨다.
내려가는 차 안에서 멀뚱멀뚱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어머니를 외면한 채
우리는 그냥 창 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진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단칸방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최대한으로 몸을 웅크리고 자야 겨우 네 명이 잘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서서히 비뚤어져 갔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꼼짝도 하지 않고 집을 지켜야 하는 일에 차츰 짜증이 났고 나중에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가만히 멍한 채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꿈도 희망도 없는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우리의 처지가 딱해 보였던지 동네 사람들은 이것저것 먹을 것을 들고 왔다.
자존심 강한 아버지가 그걸 가만히 보고 계실 리가 없었다.

“그런 것 필요없어요.”

목소리는 컸지만 왠지 아버지는 쓸쓸해 보였고 지친 듯했다.

나와 오빠는 어머니와 많은 입씨름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목욕은커녕 세수하는 것조차 싫어하셔셔
한 번 세수를 시켜 드리려면 세 시간이 넘게 싸움을 벌여야 했다.
또 어머니는 우리들이 잠든 밤에 자꾸 밖에서 서성거리셨기에 우리는 자다 깨서 정신없이 어머니를 찾아다니기가 일쑤였다.

“어머니, 집에 들어가세요.”
“싫어 안 가.”

이렇게 실랑이를 하다 보면 자연 언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항의로 결국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어머니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어머니는 결국 제정신을 찾지 못하시고 마는 걸까.
어머니 때문에 오빠와 나는 대학을 포기했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여기저기를 전전하고 있다.
너무나 막막한 이 현실에 아빠와 나, 오빠 모두 힘들어하고 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어머니가 많이 밉고 원망스럽다.
그래도 나를 낳아 주시고 이만큼 길러 주신 우리 어머니를 나는 사랑한다.
사랑하기에 더 아픈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픔을 참아낼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었으니까 나는 좀더 씩씩해지고 싶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