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고 슬픈 만남은 그 만남 자체가 사람을 참으로 힘들게 한다.
그날도 그랬다.
약속 장소로 가는데 너무나 한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마치 옴니버스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설렘과 착잡함이 교차되어 내 머리 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급기야 굵은 빗줄기를 뿌렸다.
다섯 살 때 나는 엄마와 생이별을 하게 됐다.
직업 군인으로 계시던 아빠는 내가 태어난 뒤에 다른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
그 일에 충격을 받은 엄마는 시골에 계신 친할머니께 나를 맡겨 놓고는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할머니가 계신 곳은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벽지였다.
그곳에서 나는 할머니랑 고모랑 셋이서 함께 살았다.
기약 없이 떠나 버린 엄마의 자리를 할머니가 대신 채워 주셨다.
그러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한 뒤에 서서히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 우산을 들고 나오는 엄마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소풍이나 운동회날 엄마 손 꼭 붙잡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런 날에는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할머니 몰래 베갯잇을 적시곤 했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안은 채 나는 생각했다.
"내가 크면 꼭 엄마를 찾아서 왜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는지 물어 볼 거야.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는 어떤지 궁금해. 그
리고 불러 볼 거야.
“엄마”라고…."
나는 나를 낳아 주신 엄마한테 엄마라고 한번 불러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평생 엄마라는 말을 못해 봤기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일찍 시작한 사회 생활로 인해 많이 바빴지만
머리 속엔 언젠가 엄마를 꼭 한번 만나 볼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잠재 의식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형편과 여건은 그렇게 쉽게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아빠가 새로 시작한 가게의 개업식을 보기 위해 가던 중 나는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다.
평생 휠체어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하반신 마비가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통곡하고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나 세상은 나로 하여금 다른 환자들의 위로와 격려 속에 다시 태어날 것을 부추겼다.
덕분에 많이 회복되었고 일년 반의 긴 투병 생활을 마치고 퇴원할 수 있었다.
얼마 뒤 나는 장애인협회 지부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되찾아 갔다.
서서히 생활이 제자리를 찾아갈 무렵 어느 날 나는 비를흠뻑 맞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엄마가 떠올랐고 당장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 좀 찾아 주세요.”
나는 가끔 우리 사무실에 들르는 정보계 형사에게 부탁했다.
우선 엄마의 이름과 나이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에 아빠께 여쭤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던 아빠가 이제 와서 그런 걸 왜 묻느냐며 나를 꾸짖었다.
하지만 나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는 새엄마는 아빠와 싸워 가면서까지 엄마의 이름을 알아봐 주셨다.
그렇게 하여 우여곡절 끝에 똑같은 이름과 비슷한 나이의 사람을 세 사람 찾을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던 중 외삼촌이 있다는 얘기를 문득 기억해 내고는 또다시 아빠에게 물어 봐 달라고 새엄마에게 부탁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끝내는 외삼촌 댁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가….”
외숙모는 나의 이름을 듣고 대번에 소리쳤다.
“뭐, 뭐라고? 니가 영지라고. 내가 니 외숙모다. 이게 무슨 일이고?”
외숙모는 그 즉시 엄마와 통화할 수 있도록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네, 맞는데요.”
처음으로 들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고 엄마도 그저 울기만 하셨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울다가 우리는 전화를 끝내며 만날 날짜와 장소를 정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경황없이 며칠을 보낸 뒤 드디어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일찍부터 약속 장소인 터미널로 나가 기다리는데 긴장과 초조가 나의 가슴을 짓눌렀다.
“니가 혹시 영지니?”
“네.”
“영지가 이렇게 컸구나. 내가 이모야. 어쩌면 좋니?”
그럼 그 옆에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계신 분이 엄마란 말인가.
우리는 자리를 옮겨 경포대 해수욕장 근처로 갔다.
그런데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렇게 그러워하던 엄마를 직접 만났는데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세워 어느 횟집에 들어갔는데 불편한 내 몸을 보고 엄마와 이모는 계속 한숨을 쉬면서 우셨다.
엄마의 차림새를 보니 꽤 멋을 부리고 다니는 듯했다.
연신 고개를 못 들고 계시는 모습이 자식을 버리고 간 부모의 죄책감을 과장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가슴 한구석에 꽁꽁 묻어 두었던 원망이 치밀어 오를 무렵 엄마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용서해라. 흐흑, 어른들 잘못으로 어린 네가 고생만 했구나.
그렇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단다.
미안하다.
니가 얼마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를 보니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엄마와 그렇게 울기만 하다가 끝내 평생 소원이었던 “엄마”라는 말을 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날 사람의 죄 중에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