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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빚으로 얼룩진 결혼 생활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59)

2011-03-04 21:30


“안돼! 관상을 보아 하니 그 놈은 평생 가난하게 살 팔자야.
어느 부모가 자식 안되는 걸 바라겠느냐. 결혼은 죽어도 안 된다.”

단지 가난하게 살 관상이라는 이유로 나의 선택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일주일 간의 단식 투쟁과 침묵 끝에 마침내 아버지의 결혼 승낙을 받아 냈다.

그런데 결혼식 날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알 수 없는 불안의 정체는 신혼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가며 나는 나의 결혼을 몹시 후회했다.
결혼 전 나는 경제적인 조건을 따지는 건 이미 빛 바랜 사랑이며 사람이 좋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서 하도 다그치기에 몰래 그의 집을 찾아나섰다.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찾아간 곳엔 허름한 한옥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가슴이 멎는 듯했다.
골목길을 정신없이 빠져 나와 버스를 타고 가다 종점인 이촌동 한강변에 내렸다.
나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울었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자식들을 학교 보내기조차 버거웠던 시절,
난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스스로 학비를 해결하며 졸업했다.
그러나 결혼해서도 가난의 늪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밝고 친절하며 긍정적인 그 사람을 현재의 조건 때문에 포기한다는 건 결코 젊은이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에
모든 걸 비밀로 하고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실망하실 부모님 때문에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엄격하고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 유일한 대졸 학력자인 나를 유난히 사랑해 주셨다.
데리고 다니며 자랑하던 딸이었기에 당신이 느낀 허탈감과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아버지는 다행히 건강을 되찾으셨지만 명절 때나 볼 수 있는 사위에게는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으셨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잘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의지와 각오를 물거품으로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의 신혼집(사실 이 집 때문에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집 사 줄 정도의 경제력은 되는 줄 알고 부모님이 안심하셨으니까)이
반 이상 사채에 물려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시어머니는 내가 시집오기 전에 부동산 투기를 하다가 한 번 전재산을 날린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장가를 드니 허영심 때문에 빚을 내서 일단 집을 사 주고 나중에 나를 통해 그 빚을 갚아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어머님이 내게 부탁한 게 대출 보증이었다.
한 번 선 보증은 횟수를 거듭해 급기야 돈을 이리 빼서 저리 박으며 빚 갚느라 정신없이 살게 되었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는 신체 장애로 인한 열등감을 물질로 보상받으려 했다.
시어머니의 소비 욕구는 거의 광적이었다.
결혼 전에 남편이 만들어 준 카드로 마구 긁어대며 사들인 옷과 구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 결제 청구서는 언제나 우리 앞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가족들 가운데 시어머니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그런 모습을 불쌍하게만 여겼다.

이래저래 우리에게 떠넘겨진 빚은 1억8천만 원.
둘이 벌어들인 수입은 고스란히 이자를 갚는 데 쓰였다.
불어나는 사채 이자와 카드 결재액,
생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걸려오는 채무 이행 독촉 전화,
무조건 떼쓰면 돈이 나오는 줄 알고 더욱 노골적으로 나오는 시댁 식구들,
무능력한 시아버지….
나는 날마다 방 안을 서성이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각종 정보 신문에 나온 대출 문구를 들여다보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미련한 짓을 반복하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남편과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시어머니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동안 사용하던 모든 카드를 사용 중지시키고 더 이상의 어떤 지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자식이 부모를 위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도리어 역정을 내셨다.
밥 대신 라면을 먹는 우리에게 먹을 게 없으면 빚 갚기 전에 양식을 먼저 사 놓으면 되지 않느냐며
당신 아들 살 빠지게 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어렵게 버티다가 우리는 결국 빚쟁이들의 압류로 작은 월세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직도 이사한 사실을 모르는 친정어머니는 우리 집에 와 보는 게 최대의 소원이다.
그래서 나는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얼마나 속이 타는지 모른다.

이사한 뒤로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끔씩 술을 찾게 되었다.
내가 고집을 피워서 한 결혼이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하고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교에서, 집 앞에서, 목욕탕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돈 걱정들을 게우고
널브러져 있는 나를 업고 와 말없이 목욕시켜 주는 착한 남편이 있기에 이렇게 살아간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걸려오는 빚 독촉 전화,
차비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십 원짜리까지 모조리 뒤져 간신히 출근하던 기억,
월세를 내지 못해 밤거리를 헤매던 수많은 날들,
수첩을 뒤적이며 돈 꿔 줄 사람을 찾다가 흘린 눈물….
나는 언제쯤 평화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에게 치여 마음도 닫아 버린 채 살던 나는 그간 고마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사정도 다 들어 보지 않고 대뜸 보증을 서 준 사람,
차비 없이 집에 갈까 봐 가방 안에 몰래 만 원짜리를 넣어 주던 동료 언니,
언제든 전화만 하라며 든든한 은행이 되었던 사람….
모두의 빚을 갚게 될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시어머님이 변화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