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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내 인생을 바꾼 그 해 겨울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77)

2011-03-06 12:53

나는 열아홉 살의 애기 엄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소녀일 뿐이다.
지금 그 아기를 키우고 있지는 않으니까.
이 말만 들은 사람들은 날 싹수없는 계집애라 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몽 같은 그날의 일만 없었다면 나는 미혼모가 아닌,
지금쯤 불안해 하면서도 대학의 낭만을 꿈꾸는 평범한 고3이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내신 성적 2등급에 교우 관계도 좋은 편이었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파였기 때문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고1 겨울,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바로 그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골목길 모퉁이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검은 물체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놀라서 쳐다보니 H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나와 한 동네에 살면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왠일이야? 나 기다렸니? 늦게 오는 거 알고 있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앞장서 걸어가는 순간, 그는 내 팔을 급히 잡아채 돌려 세우고는 얼굴을 후려쳤다.
번쩍 하고 불빛이 보이는 듯했다.
몹시도 아파 눈물을 찔끔거리며 뭔가 말하려고 하자 날 벽에다 세게 밀쳤다.
아무런 방어도 할 새 없이 벽에 등을 부딪친 나는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나를 이번엔 땅바닥에 쓰러트렸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끔찍했던 그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흐느껴 우는 내게 그는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옷을 추슬러 입고 집에 들어갔다.
피곤한 척하며 내 방으로 가 홀로 흐느껴 울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하지? 차마 엄마에게도 얘기할 수 없으니…."

그 뒤로 나의 모습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수가 줄고 매사에 흥미를 잃어 가자 주위에서 걱정스러워 했지만 나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이삼 일 계속되는 울렁거림을 엄마에게 호소하자 엄마는 워낙 아침을 굶고 다녀서 위염이 생긴 게 아니냐고 하셨다.
조퇴하고 내과에 가 진찰을 받으니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맞지?”
“네.”
“저어… 학생, 이런 말하면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난 산부인과 진찰을 권하고 싶어.”

나는 그 길로 병원을 뛰쳐나와 한참 방황하다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아빠, 엄마, 심지어 중학생인 남동생까지 얼굴이 하얗게 되어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 손을 잡아 끌며 말씀하셨다.
 
“얘, 너 그게 무슨 얘기야? 사실이니? 아니지? 응? 어서 말 좀 해봐라.”

내가 진료비를 내지 않고 도망친 이유도 있었겠지만 학생 신분에 임신한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의사가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다음날, 엄마와 함께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힘이 쭉 빠져 버린 엄마와 학교로 가 담임 면담을 요청했다.
학교에는 집안 사정상 전학 가는 걸로 해 두었기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친구들은 몹시 섭섭해 했다.
선생님들도 좋은 대학 가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셨다.

정든 학교를 떠나며 앞길이 막막했지만 일단 아기 문제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아빠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서 낙태할 것을 강력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엄마는 가엾은 생명을 죽일 순 없다며 극구 반대하셨다.
이 문제로 두 분은 자주 다투셨고 급기야 방을 따로 사용하셨다.
나는 이 모든 게 내 탓이라 생각되자 더 이상 집에 붙어 있을 염치가 없었다.

임신 4개월째로 접어들던 어느 날, 나는 새벽 일찍 짐을 싸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 행 기차를 탔다.
역 근처 가로등에 붙어 있는 "여종업원 구함" 이라는 광고 스티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자라서 가는 곳마다 거절당하기를 십여 차례,
여기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들른 한 단란주점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사정을 듣고 딱하게 여긴 마담 언니는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미성년자들의 출산을 돕는 곳도 알려 주었다.

나는 두 달 간 일하고 아기를 낳기 위해 "○○의 집" 이란 곳으로 갔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또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이 되어 그런 대로 적응하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네 달이 지나 건강한 사내 아이를 낳았다.
출산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쪼글쪼글하고 빨간 아기 얼굴을 들여다보자, "저 얼굴에 내가 있고 또…" 하는 생각이 들자 죄스러워 아기를 더 이상 볼 면목이 없었다.
좋은 부모 만나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얼마 후 아기는 해외에 입양되었다고 한다.

출산 후 나는 단란주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기다리겠다던 마담 언니는 간 곳 없고 가게가 폐쇄되어 있었다.
미성년자를 고용한 것이 적발돼 구속되었다고 했다.
나는 또 어딜 가 누굴 의지하며 지내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내린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작은 도시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급해 온갖 생활정보지를 샅샅이 뒤져 마침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되었다.
일이 고되고 주인의 잔소리가 심하긴 했지만 보수가 좋아서 묵묵히 일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했다.
주말에 식당이 쉬면 예식장에서 음식을 나르며 일당을 벌기도 했다.
자취방 주인 아주머니에게서 "독한 여자" 라는 소리까지 들어 가며 그렇게 살기를 꼭 일년.
지금 내 통장에는 270여 만 원이라는 돈이 고스란히 저축되어 있다.

학교 다닐 때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장애를 만났다고 도중에 포기해 버리는 건 아직 푸른 미래를 가진 젊은이로서 용납할 수 없다.
나는 더욱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갈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좀더 당당한 모습으로 그리운 가족을 꼭 만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