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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이제 눈물을 아끼렵니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90)

2011-03-07 08:31

 
어느새 내 나이 스물여섯이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친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하거나 직장 다니는 친구 등
어떤 모습으로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몫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나도 대학 일학년 겨울 방학 때까지 내 삶에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현듯 오른쪽 눈이 전혀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서는 "망막 박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사실 난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유명하다는 안과를 빈번이 드나들었다.
시력은 왼쪽 눈이 0.2, 오른쪽 눈이 0.3이었는데도 특수 안경이나 렌즈, 수술로도 시력 교정이 안 되는 특이한 눈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어야 했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이면 짝꿍의 공책을 보고 옮겨 적느라 바빴다.
글씨를 쓰거나 책을 읽을 때면 얼굴을 5센티미터 남짓 가까이 대고 보았으니 내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집중되었겠는가.

문제는 상급반에 진급할수록 심각해졌다.
수업 내용이 점점 어려워져 선생님 말씀만 듣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짜증이 늘고 수업 태도는 엉망이 되어갔다.
책상에 엎드려서 자기도 하고 멍청히 창 밖을 내다보거나 선생님 몰래 소설책과 만화책을 꺼내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시험이 다가오면 일주일 정도 앞두고 혼자 공부하느라 새벽녘까지 학습서와 씨름을 했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하니 어려움이 많았지만 성적은 반에서 일이등을 다투었다.

이렇게 남몰래 눈물 흘리며 힘겹게 공부하여 모 대학의 국문과에 입학했어도 실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니 모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나는 오빠 내외와 함께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동안 몰랐던 게 약이었을까?
난 눈 수술을 받게 되면서 예전에 비해 나의 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눈 안의 수정체가 아래쪽으로 쑥 빠져 있으며
지나치게 큰 키와 깡마른 몸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보통 사람보다 긴 이른바 "마루판 증후군"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이고 체중이 50킬로그램도 채 안 되었던 것은 비정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술 전에 전신 마취를 위해 몇 가지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수술은 일단 연기되었다.

나의 보호자였던 오빠와 올케 언니가 잠시 집에 내려간 사이 마취과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이라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전신 마취를 하겠습니까?”
그 또한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일년 간 요양하며 쉬기로 했다.
그러나 일년 뒤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리란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시력이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속내를 모르던 주위 사람들은 시집을 잘 가려면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할 게 아니냐며 복학할 것을 권유했지만
영어 사전과 옥편의 글씨를 아무리 기를 쓰고 봤자 도저히 알아볼 수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 뒤로 나는 93년에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되었다.
다른 일은 할 엄두도 못내고 그럭저럭 집안일을 돕거나 간간이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도 나는 좌절감만 씁쓸히 맛보았다.
레스토랑을 겸한 어느 카페에 나가 일하다가 단 보름 만에 쫓겨나고 만 것이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손님의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붓다 어느 선까지 따랐는지 명확히 보이지 않아 테이블보를 적시는 실수를 저질렀다.

또 어느 손님이 부르는지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해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과 DJ오빠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일할 수 있었다.
힘들어도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하루는 새 지배인이 부르더니 “여기는 너 같은 애 도와주는 자선 단체가 아니야”라는 말을 냉정하게 내뱉었다.

그곳을 그만두고 일할 곳을 다시 찾아보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큰 슈퍼의 카운터에서 일하려 해도 가격표의 숫자도 제대로 못 보는 나 같은 사람을 고용해 줄 리 없었다.
사무실 경리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피아노나 컴퓨터를 배우려고 했지만 오선지 위의 음표와 모니터 글자가 또렷이 보이지 않았고,
공장에 가서 일할까 했는데 그것도 체력이 따라 주지 않으니 불가능했다.
얼마 전에는 수화를 배워 보려고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가 손가락 모양을 보여 주는 흑백 사진들이 흐릿하기만 해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집에서만 생활하다가 갑갑해서 밖으로 나갈 때면 누굴 만나더라도 말없이 얼른 그 자리를 피할 궁리만 할 뿐이었다.
나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사람 만나는 걸 꺼리게 되었다.
하루하루 그렇게 지내는 가운데 왼쪽 눈마저 망막 박리가 되어 작년 여름에 또다시 수술을 받았다.
마지막 수술이 되길 간절히 바랐는데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은 잘 마쳤다고는 하지만 상태는 앞으로 지켜봐야 알 것 같다.
눈 안에 집어넣은 실리콘 오일을 제거하면 또 망막이 떨어질 수도 있어서 아직 불안하다.
그래서 난 날마다 기도를 한다.
제발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이제 감사하며 살겠다고.

한때 나는 아무도 없을 땐 소리내어 펑펑 울기도 하고,
식구들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스로를 비하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눈물을 아끼며 살고 싶다.
나보다 더욱 힘든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난 지금 이따금 혼자 외출을 해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많이는 못 읽지만 하루에 몇 페이지씩 책도 읽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수 끓여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작은 일에도 기뻐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마음을 다지니 한결 평안해지고,
예쁘지 않은 얼굴에도 엷은 웃음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