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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성산에서는 뿔소라 껍데기에 한라산을 마신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60)

2011-03-08 07:19

 

유채꽃이 피었다.
노랗게 펼쳐진 유채꽃 꽃밭에 사람들은 두셋씩 짝을 이뤄 단추처럼 박혔다.
검은 땅에 노란 유채꽃 피고, 또 검은 점 같은 사람의 머리가 박혀 흘러 다닌다.
제주의 봄은 검은색과 노란색의 대비로 시작된다.
이런 극한 대조는 제주의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꽃은 부드럽게 아름답고, 그것을 둘러싼 돌담은 거칠게 아름답다.
거기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검은 머리도 아름답다.

유채꽃 길을 지나 성산으로 간다.
성산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오조리에서 성산 포구 쪽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고성리를 거쳐서 가는 길이다.
길은 달라도 결국은 성산에 닿는다.

그간 성산을 오르내린 것이 몇십 번은 될 것이다.
그 중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아들 녀석과 조카를 데리고 왔을 때의 일화다.
날씨가 몹시 추운 1월이었다.
제주는 우리나라의 가장 남단에 위치해 있어서 따뜻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비록 기온은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으나,
바다 한 가운데 위치한 섬이라 바람의 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어떨 때는 아예 걷지 못하고 기어서 가야 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바람이 세다.
그날이 그랬다.

추운 날이어서 집에 있을까 하였더니, 아들 녀석이 밖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성산에 갔다.
비바람은 거칠었고, 창문만 조금 열어도 톱날 같은 바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동갑내기인 아들과 조카는 기어이 성산을 오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라 해 놓고서 나는 차 안에서 기다렸다.
제주 바람의 매운 맛을 모르는 녀석들이 몇 미터 못 가고 말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두 녀석은 맞서 오는 대풍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몸이 몇 번 밀리기를 반복하면서도 기어이 포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몸들이 산을 오를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매표소 아저씨가 미리 말렸을 때, 나는 웃으면서 몇 미터 못 가고 돌아올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해 두었다.
매표소 아저씨도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녀석들이 해녀의 집이 보이는 절벽 위까지 가더니 돌아왔다.
덜덜 떠는 녀석들을 재빨리 차로 들어오게 해 놓고, “왜 정상까지 갔다가 오지 그랬어?” 하고 놀렸다.
그러자, “아빠가 가 보세요. 인간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아들이 말했다.
“그래, 맞아. 저기까지 간 것도 너희들이니까 가능했을 거야.”
그러자 두 녀석이 똑같이 대답을 했다.
“맞아요. 우리는 사나이니까요.”

결국 두 녀석이 성산에 오른 것은 그해 여름이 되어서였다.
금방 간다고 떠났는데,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돌아왔다.
뛰어 올라갔다가 뛰어 내려온 것이었다.
산을 막 다녀와 헐떡이고 있는 녀석들에게 내가 말했다.
“사나이들이라 다르긴 다르구나.”
그러자 녀석들이 환하게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산리까지 와서도 정작 성산에는 오르지 않곤 한다.
너무 알려진 곳이라 식상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하지만 성산은 아무리 보아도 다시 보이는 곳이다.
항공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성산의 전면을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산의 풍광은 언제 보아도 절창이다.

그렇다면 앞태만 보고 말 수는 없다.
성산의 뒤태는 바다이고, 옆태는 우묵개와 터진목이다.
나는 이따금 터진목에서 저물어가는 날을 맞으며, 내 그림자가 성산에 닿을 때까지 서 있곤 한다.
터진목에는 좀녀(해녀)들이 갓 건져 올린 싱싱한 멍게나 해삼이 있고, 좀녀들의 숨비소리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소주 한 잔 하자는 일행의 말을 따라 우묵개로 향했다.
거기에 단골로 다니는 집이 있다고 하였다.
멍게에 해삼에 소주 한 병을 시켜서 소라 껍데기에 따라 마셨다.
누군가가 제주의 소주, 한라산은 뿔소라 껍데기에 따라 마셔야 제맛이라는 말을 하였다.
한라산을 바다의 귀에 부어 마시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산정은 희고 높아 고고 했고, 바다는 시퍼렇게 몸을 뒤집으며 철썩거렸다.
한라산의 흰 눈(雪)빛과 바다의 청록색과 유채의 노란 향기가 몸으로 파고들어,
가장 빨리 찾아온 봄이 내 몸으로 드는 것 같았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