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이른 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비극은 시작되었다.
부엌에서 연탄불을 갈던 어머니가 갑자기 간질 발작을 일으켜 그만 연탄 아궁이로 "쿵!" 하고 엎어져 버린 것이다.
난 너무도 무서웠지만 오로지 불구덩이에서 어머니를 어서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울부짖으며 있는 힘껏 몸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불길이 그만 어머니의 치마를 휘감더니 이내 온몸을 덮어 버렸다.
난 더 이상 어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침 그때였다. 옆집 공사장에서 작업을 하던 목수 아저씨들이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어머니에게 물을 끼얹고 불을 끄더니 어머니를 번쩍 들어 큰 물통에 담그는 것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희미하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나의 유년 시절은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뒤 어머니는 일년을 넘게 병원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온몸에 입은 화상 때문에 십여 차례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동안
아버지는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직장에서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받고 그것도 모자라 엄청난 빚까지 떠맡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에 올라갈 무렵 어머니는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건강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아 계속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당시 조그만 회사에서 잡부로 일하던 아버지의 월급만으로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
밥 한술에 김치와 간장 한 종지로 겨우 끼니를 때우거나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학교에 가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삶에 지친 나머지 술로 세월을 보내셨다.
그런데 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이 되던 해 여름, 화상 때문에 걸음걸이가 불편하시던 어머니가
장독대에서 넘어지면서 항아리에 머리를 부딪혀 뇌출혈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내가 또 목격하고 말았다.
"난 왜 어머니가 다치는 순간마다 꼭 옆에 있게 되는 걸까…."
어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가 뇌수술을 받았다.
스님처럼 머리를 깎은 어머니의 모습,
병원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
간호사가 들고 나온 양동이에 담긴 새빨간 피….
너무 끔찍한 기억들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수술비를 감당 못한 아버지는 또 빚을 얻으셨다.
나와 내 동생은 급기야 서울 큰댁에 가서 살게 되었고, 할머니가 내려오셔서 어머니의 병 간호를 맡으셨다.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잠시 잊고 지내던 집안의 우울함이 나의 온몸을 감쌌다.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 누워 계시고 아직 의식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후로도 한참 뒤에야 어머니는 집에서 겨우 요양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두 평 남짓한 조그만 단칸방을 떠나 논이 있는 호젓한 시골 동네로 이사를 했다.
고모와 큰아버지께서 보내 온 돈으로 허름한 시골집이지만 우리 집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흐뭇함도 잠시, 나는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야! 니네 엄마 외계인이지?”
“쟤네 엄마는 꼭 괴물 같애.”
“너도 이 다음에 크면 엄마처럼 변하냐?”
아이들의 그런 손가락질을 받을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어머니는 온몸에 입은 화상 흉터 때문에 한여름에도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긴 팔 옷을 입어야 했고 손가락도 성한 데가 없어 타다 만 숯덩이처럼 보였다.
게다가 뇌수술을 받은 뒤로 후유증이 생겨 반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걸을 때에도
마치 뇌성마비 환자 마냥 편안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어디 가서도 어머니 얘기를 자랑스레 남들 앞에 꺼낼 수 없었다.
그런 대로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별일 없이 잘 지나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질 발작이 그친 건 아니었기에 늘 마음졸이며 지냈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던 해에 우리는 그 집을 팔고 다시 셋방살이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다시 두어 차례 병원 신세를 지고 아버지가 어느새 노름에 빠져 계속해서 집안에 빚이 불어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나서는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황폐한 나날을 보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못내 안타깝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식당 잡일, 막노동, 웨이타 등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막연히 돈만 벌며 지냈던 것이다.
그러다 군대에 갔다 온 뒤 군에서 배운 몇 가지 기술로 지금은 병원에서 관리직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는 약에 의지해 살고 있고, 아버지는 빚을 갚아 나가느라 힘들어 하신다.
때로는 셋방살이와 빚더미에서 못 벗어나는 현실이 답답해 화가 나기도 하지만
나마저 그릇된 길로 들어서면 우리 가정은 무너진다는 생각에 버티고 살아갈 따름이다.
동생도 학교를 졸업해서 이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나 또한 건강하니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진 빚도 억대에서 이제 사천만 원 정도로 많이 줄었다.
더구나 나에게 가장 기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아직 우리 집안 사정을 잘 모르고 있어 조금 걱정이 된다.
하지만 “가난해도 착해서 좋다”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은 나에게 더없는 행복을 준다.
내게 남은 작은 소망이 있다면 야간 전문대학에라도 진학해 못 다한 공부를 하는 것과
어머니가 다시는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평안하고 건강하게 생활하시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선 이 자리에서 긴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밝고 평온한 가정을 되찾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