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빛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 볼 수 없는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다.
베니어 합판과 스티로폼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그곳은 꼭 움막 같았다.
습기가 많아서인지 누렇게 변한 벽지에서 나는 눅눅한 곰팡내를 맡으며 오 년을 살았다.
매일 술독에 빠져 지내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술주정을 인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는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노력.
그 속에서 나의 사춘기는 퍼렇게 멍들어 갔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도박과 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좌절감은 더욱 컸다.
음지 식물마냥 숨죽여 지내던 그 시절 나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좋은 집에 살면서 돈을 풍족하게 쓰는 사람들을 보면 미움과 울분이 마음 한 구석에서 토해져 나왔다.
그즈음 내가 부잣집 아이들을 누르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부뿐이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저녁 여덟시가 넘었다.
그때부터 나의 공부는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생과 라디오를 듣고 있는 누나,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
술을 마시고 있는 아버지.
이렇게 다른 식구들이 좁은 방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방 구석에 밥상을 갖다 놓고 책을 펼쳤다.
그러면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공부할 내용만 눈에 들어왔다.
학교 수업 시간엔 잠이 모자라 졸음이 쏟아졌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공부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눈병이 생기고, 결국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중학교 첫 시험을 치렀다.
얼마 뒤 성적표를 받아 본 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반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세상에 대한 오기가 생전 처음 1등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 첫 시험에서의 우수한 성적이 중학교 시절 내가 크게 빗나가지 않게 해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도박과 술주정은 계속되었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에는 여지없이 부부싸움을 하셨고,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흠씬 두들겨 맞으셨다.
“엄마, 차라리 이혼하세요. 왜 이렇게 살아요?”
나는 진정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길 바라며 몇 번이나 이렇게 외쳤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달랐다.
“너희들만 반듯하게 잘 자라 준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맞은 상처가 허리 디스크로 번져 고생하면서도 오직 자식 때문에 그 지독한 삶의 굴레를 견디고 계셨던 것이다.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 즈음 나는 곧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설레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심한 축농증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불러 앉혀 놓고 말씀하셨다.
“철아, 네가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가 이 에미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동생들 뒷바라지는 누가 하니?”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너무도 서운하고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졸업식날 학교에 오신다는 어머니를 못 오시게 극구 말렸다.
졸업생 팔백여 명 중 9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면서도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는 것이 속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졸업식이 시작되어 내가 반 대표로 교단에 올라가 상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상을 받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멀리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옆으로 몸을 숨기시는 어머니를 본 순간,
나는 그제야 어머니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을 했다.
첫 월급 13만 2천 원을 받은 날, 나는 천 원짜리 옥수수빵 하나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서 어머니와 동생과 즐겁게 빵을 나눠 먹으며 어머니께 월급 봉투를 내밀었다.
월급 봉투를 받아 든 어머니께서는 그만 눈물을 흘리셨다.
그 뒤 어머니께서도 진통제를 하루에 몇 알씩 먹어 가며 아픈 몸을 이끌고 숟가락 공장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자식을 고등학교에도 못 보냈는데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공장 생활은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일을 못 하게 될 때까지 육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꿋꿋하게 삶을 헤쳐나가리라 다짐했고,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결국 나는 스물두 살의 늦은 나이에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교육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펄쩍펄쩍 뛰며 나보다도 더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뒤 동생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다.
내년이면 나와 동생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아버지께서도 삼 년 전부터 도박에서 손을 뗐고 술도 적당히 마시며 열심히 생활하신다.
그런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에서 불행했던 지난날의 기억보다는 행복한 앞날을 기대하게 되었다.
우리 가정이 이렇게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은 어머니의 끝없는 인내와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며 지금까지 가정을 지켜 오신 어머니,
당신께서 짊어질 짐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제는 내가 대신 좀 지고 갔으면 하는데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나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고 진통제로 버틴 후유증으로 모든 신체 기관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축농증 수술과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급성 뇌막염,
자궁에 혹이 생겨 받은 자궁 제거 수술….
이런 어머니를 바라보면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답답할 뿐이다.
나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셋이서 돈을 모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텃밭에는 채소를 심고 가축도 기르며,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맛있는 저녁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머니 꼭 건강하셔야 합니다.
장남인 제가 장가가서 손주 안겨 드릴 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