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아버지는 끝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신부인 나는 아버지 대신 신랑의 손을 잡고 입장해야만 했다.
20여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불러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를 그날 그토록 기다렸던 것은
언니와 오빠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던 아버지가 뒤늦게나마 나의 결혼식에라도 참석해 자식들의 행복을 기원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끝내 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기어이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보이게 했던 아버지는
20여 년 전 우리 사남매와 삼십대 중반의 젊은 어머니를 버리고 이혼도 하지 않은 채 딴살림을 차렸다.
아버지가 새여자와 아들 낳고 잘산다는 소식을 가끔씩 먼 친척을 통해 듣는 동안
어머니는 전주에서 먼 경상도까지 오가며 장사해서 우리를 키웠다.
비가 뚝뚝 새는 셋방에서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살았다.
장사로 바쁘신 어머니가 자주 집을 비우는 바람에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끼리 보냈는데,
한 번은 경상도 함양으로 수금을 가신 어머니가 여드레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라면을 외상으로 사다 끓여먹으며 불안과 공포에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전화가 흔치 않았던 그 시절, 장마철이라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차편이 끊겨 오지 못했다며,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가 우리를 보듬고 우실 때 우리는 어머니가 돌아와 준 것만 해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행복이었으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 살게 되기까지는 너무 큰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딴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식들한테 미련이 남았던 아버지는 울며불며 말리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우리들을 서울로 데려갔다.
그곳은 김포공항의 활주로가 보이는 옥탑 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 달도 채 안 돼 언니는 가발공장으로,
오빠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학교로,
나와 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렇게 우리 형제는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를 아버지에게 보낸 뒤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우연히 우리의 소식을 듣고
언니가 있는 가발공장을 찾아가 언니를 집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영특했던 동생은 원장 선생님을 졸라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예전에 아버지가 어머니와 다투면서 어머니를 향해 무수히 휘둘렀던 주먹이 생각났고,
그 무서운 눈빛이 두려웠던 나머지 고아원에 남고 말았다.
고아원의 좁은 방엔 늘 지린내가 진동했고,
허연 김치 하나가 반찬의 전부였지만 무서운 아버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나는 꾹꾹 잘도 참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찾아와 나무 그늘에 나를 앉히고 손톱을 깎아 주며 말씀하셨다.
“지금은 식구가 많아 너까지 데려갈 형편이 못 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꼭 데리러 올게.”
어머니는 내 손톱 위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그나마 식구들을 가슴속에 묻고 익숙해져 가는 고아원 생활이 또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토록 그리웠던 어머니가 나를 어찌해 주지 못한다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그 뒤 언니와 오빠가 날 찾아왔고 얼마 뒤 나는 오빠가 적어 준 주소를 손에 꼭 쥔 채 고아원을 빠져나와
하루 종일 걸어 가족들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우리 남매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며 울음을 터트렸다.
집엔 엄마가 끓여 주신 맛있는 김치찌개가 있었고,
오빠는 구슬치기를 해서 딴 돈으로 내게 맛있는 과자도 사주었다.
동네 공사장에서 남아 뒹구는 벽돌 몇 개를 주워다가 만든 책꽂이,
손잡이가 덜렁거리는 두 칸짜리 장롱 뒤로 주먹만한 쥐들이 찍찍거리는 단칸방이었지만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했던지….
그런데 얼마 뒤 불쑥 찾아온 아버지가 내게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방 한쪽 구석에서 소리없이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울부짖었다.
“이제 제발 애들 좀 그만 내버려둬요.”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한바탕 폭언을 퍼붓고 돌아갔다.
그 뒤 우리는 연락이 끊긴 아버지를 잊고 어머니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조금씩 형편이 풀리면서 어머니의 귀가 시간도 빨라졌고,
추석이나 설 전날에는 우리들 옷을 사 오실 어머니를 기다리는 기쁨도 맛볼 수 있었다.
가을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운동회가 다 파할 때쯤 조회대 천막 옆으로 슬며시 나타나 우리를 기쁘게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누구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자란 우리 사남매는 열심히 공부해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은 모두들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머니는 가끔 누군가를 만나면 자식 자랑을 빠뜨리지 않으신다.
하지만 자식으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 하느라 여성스러움보다는 억척스러움이 더 많으신 어머니.
그렇게 되기까지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래서 나는 종종 어머니에게 차라리 아버지와 서류상으로도 이혼하고 마음 좋은 아저씨와 재혼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 어머니는
“누가 뭐래도 너희들 아버지야.
늙고 병들면 우리들이 다 거두어야 하는 거야.
막둥이 녀석이 장가들 때까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만 있어 준다면…”
하시며 아예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신다.
요즘은 가끔 서울에 있는 친척을 통해 아버지의 소식을 듣는다.
아버지가 혈압으로 수술을 한 뒤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단다.
한때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아버지,
우리 형제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아버지.
무엇보다 아직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