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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여보, 우리 아이들 훌륭히 키울께요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16)

2011-03-13 22:02

정현이 아빠가 우리 세 식구를 남기고 홀로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다.
살아 있을 적에 남편은 조그만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고 나는 집에서 간단한 부업을 하면서
두 아들의 재롱에 시름도 잊은 채 열심히 살았다.

그 당시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소망은 반 지하 전셋방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는데,
월급날이면 그이의 봉급은 고스란히 은행 통장으로 입금되고,
내가 번 돈 이십여 만 원을 갖고 한 달 생계를 가까스로 꾸려 나갔다.
드디어 결혼 5년째 되던 해 우리는 18평짜리 조그만 연립 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이사한 첫날 밤 꿈인가 싶어 남편과 허벅지를 꼬집어 보며 잠을 못 이루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술을 먹고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날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남편은 술 사오라고 시키며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고,
아이들은 아빠의 고함소리에 잠이 깨 자지러지게 울다 장롱 옆에 눕다시피 앉아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남편이 내던진 돼지 저금통에 눈썹 끝을 맞아서 눈 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남편은 어젯밤 일은 전혀 기억에 없는 듯이 상처에 약을 발라 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평소에 자상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한 모습에 나는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사고를 냈으니 현금 3백만 원을 당장 송금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적금 하나를 해약하여 돈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남편은 수백만 원씩 여러 번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딱히 이유를 묻지 못한 채 불길한 생각에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즈음 남편은 외박을 자주 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으레 회사 일로 출장을 가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하루는 아예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더니 열흘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전에는 남편이 안쓰러워 갈아 입을 와이셔츠를 날짜별로 다려서 보내 주기도 했지만 이번만은 느낌이 이상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나는 "혹시 바람난 건 아닐까" 하는 의심과 배신감에 시달렸고,
아이들이 아빠를 찾을 때에도 달래느라 곤혹을 치렀다.
나는 친정어머니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혼자 애간장을 태우며 지냈다.

남편이 여러 날 집을 비운 사이 낯선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기도 하고,
내가 슈퍼나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간혹 뒤를 쫓는 남자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두려워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이사를 서둘렀다.
바로 그때 남편이 불쑥 돌아왔다.

석 달 만에 아이들을 본 남편은 몹시 좋아했지만 나에게 어디든 떠나라고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니 6백만 원을 달라고 부탁하며 그간 숨겨 온 일들을 털어놓았다.

일 년 전쯤 남편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친구를 따라 도박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외박한 것도 도박 때문이었고, 내가 어렵게 만들어 준 돈은 모두 도박판에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야속하고, 심지가 약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남편이 쫓기듯 다시 어딘가로 떠난 뒤, 나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어느 소도시의 주공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이사하고 얼마 안 되어 시어머님이 시동생들과 함께 불쑥 찾아오더니
“네가 잘못하는 바람에 우리 아들이 이렇게까지 되었구나!” 하며 호통을 치셨다.
새까맣게 타버린 내 가슴에 대못 하나가 더 박히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시어머님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심지어 시골에 있던 논밭까지 파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 뒤로 남편을 한없이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지냈다.
그 당시 내 삶에 유일한 위안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씩씩하고 바르게 자라 주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시어머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오라고 했다.
달려가 보니 남편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부어 있었다.
도박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계속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집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도 술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결국 남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시어머님은 나를 다독거리며 말씀하셨다.
“애비가 정신 놓기 전에 너에게 꼭 전해 달라며 주더구나.”
시어머님이 내민 낡은 봉투 안에는 나의 처녀 시절 사진 한 장과 50여 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순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정한 사람, 이렇게 가면 우리 태현이, 정현이는 어쩌라고…."

한동안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워 지내던 나는 머리맡에서 울고 있는 두 아들의 눈망울을 보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지금은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식당에 다니며 일하고 있는데,
어려운 고비마다 힘이 되어 준 아이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듣지 않도록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
그리고 늘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친정어머니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이 못난 딸이 보란 듯이 잘사는 모습도 보여 드리고, 못다 한 효도도 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