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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천사를 닮은 언니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03)

2011-03-15 10:30

 
오늘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슬픈 기억에 나는 이내 눈물을 훔치고 만다.
그 기억의 주인공은 천사를 닮은 나의 언니다.
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산업 전선에 뛰어들어 우리집 살림에 큰 몫을 담당했다.
낮에는 공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중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생활하던 언니는 시간을 아끼느라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니는 자전거를 타고가다 넘어져 발목을 다쳤는데,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아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한동안 많은 약을 복용하며 지냈다.
그러다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날로 더해 급기야 아버지는 언니를 데리고 가까운 병원을 찾아갔다.
간단한 검진을 마친 의사는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게 좋겠다고 했다.

마른 하늘에 무슨 날벼락인지, 큰 병원으로 옮겨 검진한 결과 언니는 골수암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암세포의 진전 속도가 빨라 이미 다리까지 위험한 상태여서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구들 모두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그 뒤로 엄마와 아빠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마침내 언니는 오른쪽 다리를 무릎 위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받은 뒤, 의족을 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언니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한없이 눈물을 삼키면서도 늘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다시 일자리를 구해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았다.

방학이나 명절이 가까워 오면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 바로 언니였다.
어린 시절 나는 항상 동생들 손에 용돈을 넉넉히 쥐어 주는 언니가 정말 좋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으면서 동생이나 부모님께는 모든 걸 다 내줄 정도로 심성이 고운 언니,
그러나 방 한국석에 덩그러니 놓인 언니의 의족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저려와 눈물을 왈칵 쏟곤 했다.

하루는 언니와 함께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서 걸어가는데 버스가 정거장에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언니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을 쳤지만 언니는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울면서 어떻게든 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갑자기 세상이 미워졌다.
착한 언니가 왜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받고 살아야 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새 서른 살이 된 언니는 고운 마음씨 덕분인지 신체 건강한 청년을 만나 시집을 가게 되었다.
결혼식 날 다리를 절며 입장하는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너무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부어서 가족 사진도 찍지 못했다.

신접살림을 차린 지 석 달이 지나서 언니는 임신을 했다.
병원에서 몸이 약해 출산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고집을 부린 언니는 수술을 받고 예쁜 딸을 낳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기를 낳은 지 며칠 안 되어 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골수암이 10년 만에 재발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앞으로 세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져, 언니는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대전에서 직장에 다니던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수원에 있는 언니를 만나러 갔다.
병실에서 언니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후 늦게 집으로 내려오곤 했다.
언니는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는 눈치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딸에 대한 정이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애틋할 텐데도
언니는 그 정을 떼려고 병원에 데려오는 아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나는 언니에게 아기를 억지로 안겨 주었지만 언니는 끝내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결국 언니는 예쁜 딸과 형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남긴 채 이른 새벽에 영원히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날은 하늘도 서러웠는지 빗줄기가 하루 종일 땅 위를 적셔 가족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듯했다.
평소에 산을 좋아하던 언니의 몸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멀리멀리 자유롭게 날아갔다.
내 손끝에서 날아가는 언니를 느끼며 나는 울먹였다.

“언니, 잘 가.
여기보다는 언니가 가는 세상에 더 아름답고 행복한 일들이 많을 거야.
거기에서는 아주 오래오래 살아야 해.
언니. 사랑해!”

언니는 그렇게 서른한 살의 삶을 마감했다.

이제 언니의 본신인 조카는 여섯 살의 아주 귀엽고 깜찍한 꼬마숙녀가 되었다.
작년에 엄마 생신 때 형부가 조카를 데리고 왔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쁘장했던 언니를 꼭 빼닮은 손녀딸을 보고 엄마는 눈시울을 적셨다.

형부는 아직 재혼을 하지 않고 아이만 정성스럽게 키우며 혼자 살고 있다.
하지만 조카와 형부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모든 걸 잊고 좋은 사람 만나서 새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홀로 지내는 형부를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타깝고,
한편으론 죄스런 마음마저 든다.
언니도 아마 형부가 가정을 이루어 단란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리라.

2년 전에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나는 우리 아기 얼굴을 들여다볼 때면 가끔씩 언니의 모습이 떠올라 생각에 잠기곤 한다.
 
"언니도 이런 행복을 누리며 살았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