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어느 날, 화목한 우리 가정에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군대 간 오빠가 휴가를 나오기로 한 바로 그날,
서울 국군수도병원에서 급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가족들은 빨리 손 하사의 얼굴을 보러 올라오라고.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빠가 중환자실에 있다니….
오빠는 이미 제대할 날짜가 지났지만 복학 시기에 맞추려고 굳이 6개월을 연장해 일반 하사로 복무중이었다.
남들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군대를 등록금이라도 벌겠다며 남았던 오빠.
그 당시 맞장구치며 좋아했던 내가 너무 미워졌다.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 병원을 찾아갔다.
초록빛 위생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채 병실에 들어가니 오빠는 의식을 잃은 채 온몸에 주사바늘을 꽂고 싸늘한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몇 달 전에 보았던 오빠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스물다섯 살의 건장한 청년의 몸은 퉁퉁 붓고 살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모습을 보자 우리는 엉엉 울고 말았다.
오빠는 농촌에 대민 지원하러 나갔다가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것이다.
열 사람 가운데 아홉 명은 죽게 된다고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차라리 내가 저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오빠는 산소 호흡기를 떼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오빠가 우리집 장손으로서 가족의 믿음을 저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반드시 깨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오빠, 경아 왔어, 경미도 왔고.
눈 좀 떠 봐, 응?
오빠, 힘내야 돼.
우리가 이렇게 곁에 있으니까 무서워 말고,
괜찮아질 거야….”
오빠의 감은 두 눈에 물기가 비치는 듯 보였다.
오빠가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면회시간이 끝나 간호장교가 그만 나가 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다른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가 머리에 흰 시트가 덮인 채 밖으로 실려 나가고 있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를 저대로 그냥 보내지 않으리라,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다던 오빠는
다행히 동생과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난 다음날부터 병세가 조금씩 좋아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의식이 돌아왔다.
“상영아! 엄마다, 엄마 알겠어?”
그런데 오빠는 엄마의 다급한 물음에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기분이었는데 오빠는 갑자기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엄마!”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도 오빠는 우리가 자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을까 봐 익살을 부렸던 것이다.
진짜 지옥 같은 시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의사는 오빠가 뇌출혈이 심해 빨리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다.
수술은 위험 부담이 컸다.
전신마비 같은 합병증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대소변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다녀야 하고, 양쪽 무릎을 절단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쨌든 생명을 건지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결국 오빠는 피부이식 수술 등 수차례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우려한 최악의 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눈이 실명되고, 왼쪽 발가락 2개와 오른쪽 발가락 3개, 그리고 발등 위의 피부를 반 이상 들어냈다.
우리 오빠는 이제 장애인이 된 것이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몸무게가 반으로 푹 줄어들 정도로 수척해진 오빠는
자신의 발가락이 잘려 나간 사실을 알고 나서 식구들 몰래 숨죽여 울었다.
몇 달 동안 침대에서만 누워 지내던 오빠가 드디어 휠체어에 처음 올라앉은 날,
나는 살면서 다시는 느껴 보지 못할 큰 희열을 느꼈다.
병동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 일어났다고 입을 모으며 오빠를 "기적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엄청난 고통을 견뎌온 지난 열 달의 시간들.
부산 집에는 직장 때문에 아빠와 나만 남아 있고,
엄마와 동생은 병원 근처에 방을 얻어 오빠를 돌봐 왔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열심히 택시 운전하시는 우리 아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된 간호에도 얼굴 한 번 안 찡그리시는 엄마.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서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가장 노릇을 하는 동생 경미.
장녀로서 어깨가 더욱 무거워진 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 잘 알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기에 대고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요즘 오빠는 목발을 짚고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번 면회갔을 때 오빠는 나에게 말했다.
“경아야, 오빠는 이렇게 숨쉬며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단다.”
아직도 오빠가 퇴원할 날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오빠가 예전의 밝고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학교도 다시 다니고 가슴 떨리는 연애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새로운 멋진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오빠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