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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어머니의 목소리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72)

2011-03-25 09:40


집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몇 초 동안 생각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 왔다.
그건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전 민이예요, 민이.”
불현듯 아들의 음성을 듣고 놀란 어머니는 “민이라구? 네가 웬일이야. 거기가 어디냐?” 하며 다급하게 물으셨다.
“교도소예요. 우량 수에게 전화 통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연락 드리는 겁니다.”
 

오랜 세월의 아픔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84년 3월, 나는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해쳐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나 한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난 15년 동안 가족이 겪은 고통과 삶의 변화는 너무 컸다.
특히 죄인을 아들로 둔 어머니는 이웃의 따가운 눈초리에 가슴을 수없이 쓸어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십여 년 넘게 꼬박꼬박 이곳까지 찾아오셔서는 차입 물과 영치금을 넣어주셨다.
시골 고향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다시 기차를 타고,
기차역에서 내려 교도소로 오는 버스로 갈아타는 아주 먼 거리를 오시면서도 나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셨다.
오로지 건강한 몸으로 출소하기만을 간절히 바라실 뿐이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의 철부지였던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던 4년 전 초겨울 어느 날 어머니는 겨울 내의와 티셔츠, 양말을 사들고 면회를 오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더이상 찾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몹시 걱정이 되었다.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갈 즈음 불쑥 큰 형님이 면회를 왔다.

그날 나는 어머니가 나를 면회 오셨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척추를 심하게 다친 어머니는 수술을 받았으나 경과가 좋지 않아 재수술을 받으셨고,
게다가 당뇨에 무릎 관절도 안 좋아 항상 누워 계셔야 했기에 더이상 나를 만나러 오지 못하신 것이었다.
어머니의 근황을 알게 된 나는 방에 들어와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지금껏 살아온 시간들과 현재의 내 모습,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어머니가 하루 빨리 완쾌되어 다시 만나 뵙기를 맘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얼마 전 법무부의 재소자 처우개선방침에 따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어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괜찮아, 근근히 살아가고 있지 뭐. 몸이 불편해서 네게 면회 못 가는 것이…” 하고 말끝을 흐리셨다.
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게 전화를 끊고 말았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어머니께 아무 것도 해 드린 것 없는 불효자식이요,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내가 집에 없는 사이, 집안에는 어머니의 병환을 비롯해 크고 작은 우환이 잦았다.
큰누나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어, 둘째 형님이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나마저 수감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시리고 아프실까.
그 와중에도 큰 형님과 형수님은 논 수천 평을 팔아 둘째형 치료비에 보태셨다고 한다.
그런 쪼들리는 살림에도 일흔이 넘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살아가시는 형님이 얼마나 감사한 지….

형님 말에 의하면 형수님이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어머니를 너무 잘 돌봐 드린다고 한다.
알뜰하신 형수님은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동네 근처 공장에 나가, 한 달에 50만 원을 벌어 오시는데,
그 돈으로는 어머니의 통원 치료비를 대기에도 턱없이 모자란다고 한다.
어머니가 당뇨로 갑자기 아프시기라도 하면 형님은 오토바이 뒷자리에 어머니를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간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번은 어머니를 오토바이에 태우고서 빠른 속도로 가는데 왠지 가벼워진 느낌에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안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되돌려 가보니 어머니가 길섶에 엎드려 계셨다고 한다.
마음이 다급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만 어머니 떨어지면서 뭐라 하신 말씀도 못 들은 채 내달렸던 것이다.
형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울기만 했다.
나는 하루빨리 건강한 몸으로 출소해 돈을 벌어 어머니의 육신의 고통과 아픈 마음을 풀어 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형제들의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들 모두가 서로 아끼고 감싸주며 기쁘게 생활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둥글고, 계절 따라 꽃과 사람의 모습도 새롭다지만
아직 못 다한 자식의 도리와 어머님의 한을 깨끗이 풀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랄 뿐이다.
지난해 3월, 나는 드디어 무기 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어 출소할 수 있는 만기일이 정해졌다.

그리고 수형 생활을 잘 하면 더 일찍 바깥 세상에 나갈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이 오면 나는 장미꽃다발을 어머니에게 안겨 드릴 것이다.
장미꽃만큼이나 화사한 웃음을 짓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