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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고아가 부끄럽지 않은 까닭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27)

2011-03-26 09:22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어느 밤,
할아버지는 나를 깨우시더니 자전거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가셨다.
그날 이후로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는데, 졸지에 고아가 된 나는 보육원에서 내성적인 아이로 자랐다.

여러 해가 지나 원장님 친척 댁의 양녀로 가게 되어 별천지로 상상하던 서울이란 도시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올라왔지만 모든 게 낯설었다.
친구들이 그리워 보육원으로 보내 달라고 조르던 나는
아주머니에게 “너 데리고 오는 데 차비가 얼마 들었는지 아느냐”는 호된 야단만 맞고 결국 3일 만에 그 집을 몰래 나오고 말았다.

열두 살 나이에 서울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 할머니의 소개로 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자기를 엄마로 부르라며 온갖 집안일을 다 시켰다. 그
렇게 몇 달을 지내던 어느 날 옆집에 세들어 살던 언니가 말했다.

“너, 이 집 별로지? 일만 실컷 하고 용돈도 못 받는데 내가 좋은 집 말해 줄까?”

며칠 뒤 따라간 곳은 오후 네 시만 되면 십여 명의 언니들이 예쁘게 치장을 했다.
새벽 한 시까지 전화가 불이 나게 울렸고 언니들은 그때마다 미스 리, 미스 현,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불려 집을 나섰다.
그러면 나는 발이 닳도록 약국과 세탁소, 의상실을 쫓아다니며 심부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받은 돈은 50원, 100원.
그러나 빨간 돼지저금통에 푼푼이 모은 돈을 밥 하는 아주머니와 한 언니한테 뜯긴 뒤로 나는 빈털터리가 되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4년 동안 눈물나게 고달픈 세상살이를 배운 나는 그리운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원장님도 바뀌고 친구들도 대부분 공장에 취직해 나갔지만 모두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데 그 즈음 하루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 같고 목에 통증이 오더니 피를 토해 냈다.
병원에 가보니 폐결핵 3기 진단이 나왔고 오래 살아야 6개월이라고 했다.
원장님은 처음엔 걱정 말라고 하시며 보건소에서 약도 타다 주셨지만, 얼마 안 있어 냉담해지셨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병 걸리니까 찾아왔다며 대문 밖으로 내몰린 나는
매일 밤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담을 넘어 들어가 보육원 마룻바닥에서 새우잠을 잤다.
간혹 자다가 옷장 속으로 숨어야 했는데 원장님께 들키는 날이면 크게 혼쭐이 났다.
보육원 문을 닫게 생겼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으라는 원장님의 심한 말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나를 숨겨 주고 국에 밥을 말아 갖다 주던 친구들마저 병 옮는다고 하나둘씩 등을 돌릴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학을 맞아 잠시 와 있던 원장님의 조카뻘 되는 대학생 오빠가 보다 못해 나를 몰래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결핵이라 입원을 거절당했고, 이런 사실이 들통나서 오빠는 원장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도 오빠는 여전히 병 때문에 비쩍 마른 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어느 수도원을 한번 찾아가 보자고 했다.
거기에서도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는
 
“숙희야, 병을 꼭 고쳐야 한다. 이 다음에 너를 구박하고 욕하던 사람들 앞에 나타나 큰소리치며 말할 수 있도록 말이야”
 
하면서 내게 큰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 뒤 나는 시립병원에 행려환자로 입원하게 되었고, 오빠는 군에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립병원에서 기력이 좀 회복되자, 갈 곳 없는 나는 강제로 희망원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같은 방을 쓰던 정신질환을 앓는 아주머니는 밥 타오는 양동이에 대변을 누고 간질 발작을 일으켜 이불에 거품을 가득 토해 놓는가 하면,
연탄 집게로 내 등을 내리 찍었다.
좁은 방에서 누울 자리도 없어 문가에 쭈그리고 앉아 날을 새며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사정도 해보았지만 “엄마 있니? 그러면 오라고 해라”고 하여 내 마음만 더 쓸쓸해졌다.

그러다가 희망원에 결핵환자가 서른 명 가까이 늘자 나는 독방을 쓰게 되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감옥과 같은 방에 갇혀 지내면서, 문을 열어 주면 잠깐씩 햇빛 쬐러 밖에 나갈 뿐이었다.
너무 갑갑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밖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드디어 입원통보를 받고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다.
요양원은 내게 천국과도 같았다.
가족처럼 따뜻이 대해 주는 사람들 속에서 병이 차츰 나아갔다.
나는 세 달에 한 번씩 폐 사진을 찍어 보며 치료를 계속 받았는데,
사회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완쾌되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뻤다.
그리고 고아인 것도 서러운데 병 때문에 받은 온갖 수모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뒤 나는 요양원을 떠나 공장에 다니며 자립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지금은 가정을 이루어 예쁜 딸아이도 낳아 잘 기르고 있다.

22년의 세월이 흐른 이제야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고아로 자란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삶의 고비마다 생명의 은인이 되어 주신 분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특히 나에게 희망을 준 그 오빠를 생각하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해 안타깝고,
보육원 친구들도 너무 보고 싶다.
 
 
“여러분,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