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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아내여......일어나소서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14)

2011-03-27 09:02

 
월남 참전을 마치고 귀국한 1969년 겨울, 지금의 집사람을 만났다.
예나 지금이나 외로움을 잘 타던 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결혼을 했다.
그런데 달콤한 신혼을 6개월쯤 보낼 무렵 어느 날 갑자기 둘째오빠와 가벼운 언쟁을 벌이던 아내가 각혈을 하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서 얼른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가 보니 폐결핵 3기로 진단이 나왔다.
그것도 이번이 세번째 재발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을 알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런 몸으로 결혼할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집사람 대답이 걸작이었다.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환갑을 바라보는 이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가족이 아플 땐 얼마나 마음이 아린지를 깨닫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당시로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지경이라니 놀랍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아내의 길고도 지루한 병마와의 싸움은 9년을 끌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고아나 다름없던 나는 어렵게 공부해 겨우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매달 봉급의 절반을 아내 약값으로 쓰며 폐결핵에 좋다는 약은 국산이건 수입품이건 모두 구해 먹이고,
민간요법으로 징그러운 뱀탕에다 차마 말로 하기 부끄러울 만큼 별 희한한 것까지 구해다 먹였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짐승보다 더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구나!”
하고 깨달으며 냇가에 엎드려 대성통곡한 적도 있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3년 정도 흘렀는데도 아내의 병세는 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황달과 급성간장염 등의 합병증에 시달렸다.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병원비가 턱없이 부족해
조는 척하고 책상에 엎드려 울음을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사이 아내의 체중은 38킬로그램으로 푹 줄었다.
아내는 나에게 미안한지 진찰결과가 나온 날부터 내내
“당신까지 옮으면 안 되니까 돌아누워 주무세요” 하고 먼저 등을 돌린 채 잠을 청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프면 같이 아파 죽고 말지, 병 옮을까 봐 나까지 등돌리고 자면 아내 마음은 더 처량하겠지" 싶어
늘 팔베개를 해주며 아내의 가녀린 마음을 보듬어 주려 애썼다.

사람의 몸이란 아프면 마음이 산만해지고,
마음이 우울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땐 몸이 개운치 못하다는 것을 서른한 살 나이에 터득한 나는
약도 약이지만 제일 먼저 아내의 기분이 언제나 첩첩산중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도록 신경을 썼다.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날엔 걸음걸이를 아내에게 맞춰 느릿느릿 걸었고,
시장바구니는 파 한 단만 사 넣어도 당연히 내 차지였다.
그 당시로선 남자가 시장바구니 들고 다니는 일이 지극히 드물어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아마도 칠칠치 못한 남자, 남자 망신 다 시키는 공처가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의사의 지시대로 아침 6시, 낮 12시, 오후 4시 그리고 저녁 8시,
이렇게 하루 네 차례씩 체온과 맥박 등을 그래프로 작성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제출하고 치료를 받는 동안
아내의 얼굴엔 핏기가 돌면서 체중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하도 기분이 좋아 나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 한 가지 중대한 약속을 했다.
몸무게가 50킬로그램만 넘으면 당신은 "드라마", 나는 "동물의 왕국" 그런 식으로 다툴 일없이 텔레비전을 한 대 더 사주마 하고.

“오랜 기간 동안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이제 완쾌되셨습니다”
하는 의사 선생님의 찬사에 문득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니 그때서야 기쁨 뒤의 허허로움이 찾아들었다.
“그래, 우리는 아직 아이가 없구나!”
오랜 투병생활로 아이를 못 가졌고 지금껏 우리 부부에겐 자녀가 없지만 크게 마음쓰지 않는다.

그런데 재작년 겨울 어느 일요일이었다.
친한 아주머니의 생일을 앞두고 아내는 선물을 미리 전해 주고 싶다며 그 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저녁나절이 되어도 연락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던 중에 동네 정형외과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오른쪽 다리가 두 군데나 부러졌다는 것이다.

아내는 다리에 철심을 열여섯 개나 박고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나의 병 수발이 또 시작되었다.
그땐 정말이지 딸아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아내는 나에게 몹시 미안했던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목발을 짚고 화장실에 갔다가 그만 넘어져 또 팔목이 부러졌다.
침대 위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있는 아내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새벽에 엉금엉금 기어 병실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나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둘이 함께 절벽에라도 가서 확 뛰어내리자!”고 심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나는 안다.
아내는 나를 만나 평생 병시중만 들게 한 것 같아 죄스러워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아내가 내 곁에 살아 있음에 늘 감사하기만 하다.
우리 부부는 우리보다 더 고통스런 사람들을 위해 장기를 기증할 결심을 했다.

지금 또다시 나는 원인 모를 졸도로 쓰러진 아내 침상에 붙어 앉아 속으로 되뇐다.
"아내여! 2년 전에 절벽에 가자고 했던 말, 정말 내가 잘못했소…."
이번에도 나는 아내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건강을 되찾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