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향집에서 며칠 지내던 나는 엄마의 주름지고 야윈 얼굴에서 삶의 그늘을 보고 가슴이 아렸다.
엄마는 이제 다섯자식을 모두 공부시켜 도시로 떠나 보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7년 넘게 고향집을 홀로 지키고 계신다.
50여 년 전,
꽃다운 나이에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아버지께 시집온 엄마!
아버지는 어릴 때 병을 앓다가 약을 잘못 먹은 까닭에 몸만 어른이고 생각은 어린아이와 다름없었다.
행동이 모자라 사람들에게 늘 천대를 받으며 자라난 아버지가 엄마를 신부로 맞이할 수 있었던 건
술에 취한 외할아버지가 중매쟁이의 말만 듣고 논 몇 마지기 때문에 딸을 시집보내셨던 까닭이다.
엄마는 시댁식구들의 구박을 많이 받으셨다.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살림을 맡아 하다가 첫아이가 생겨 분가할 때도 물려받은 재산이라곤 조그만 초가집에 논 세 마지기가 전부였다.
엄마 자신도 6·25 때 피난 가다 포탄 파편에 맞아 한쪽 시력을 잃어서 불편하셨을 텐데
남편조차 당신 상처를 위로해 줄 수 없는 처지라 마음 고생이 더욱 크셨을 게다.
어느덧 아이 둘을 낳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엄마는 "저게 어떻게 내 뱃속에서 나왔을까?" 하며 신기해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딸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큰집에서 오빠들과 놀다 뭘 잘못 먹었는지 하루 종일 토하고 울며 보채더니,
병원에 갈 사이도 없이 엄마 가슴에 폭 안기어 모기 만한 소리로 “엄마…” 하며 활짝 웃고는 그 뒤로 눈을 뜨지 않았다고….
지금도 그 얼굴이 가끔 꿈에 보인다며 눈물을 훔치시는 엄마.
밭고랑에서 나와 나란히 풀을 뽑다 오늘이 바로 큰언니의 기일임을 기억해 내신 엄마가 하시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 뒤로 엄마는 아이 넷을 더 낳으셨는데 내가 막둥이다.
마흔두 살에 나를 낳으셨으니 내 초등학교 입학식장에 나타나신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 비하면 할머니였다.
젊었을 적 엄마 모습이 궁금해 사진을 찾아보았지만 사진 속의 엄마는 너무 희미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둘째 딸마저 복숭아를 따먹겠다고 나무 위로 올라가다 그만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엄마에게 혼날까 봐 숨겼다가 나중엔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작은언니가 혼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줄곧 학교에 업어다 주시던 엄마는 치료비 때문에 빚을 지자 힘든 농사일에 행상까지 하셨다.
여름엔 수박을 따다 시오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 파셨지만 별 소득이 없었고,
작은 방을 개조해 시작한 가게도 금방 문을 닫고 말았다.
그때부터 엄마는 조금씩 변하셨다.
동네 어른 회갑잔치나 친척들 경조사에 일하러 가셔서는 으레 한밤중에 취해서 돌아오셨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시면 항상 우시는 엄마가 싫어서
나는 이 다음에 커서 도시로 나가면 다신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며 귀를 틀어막곤 했다.
하지만 그러던 나도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어 막둥이만은 잘 키우리라던 엄마의 다짐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못나고 어리숙한 남편 만나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짊어지셔야 했던 엄마.
그것도 모자라 자식들 때문에도 줄줄이 맘 고생을 하셨던 엄마는 어느새 칠순이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 때문에 늘 걱정이시지만,
산이랑 들로 다니며 부수입 거리를 찾으실 만큼 건강하시더니 고사리를 꺾으시다 허리를 삐끗하셨다.
병원에 가보니 골다공증이라며 절대 무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농촌에서의 삶이 어디 그리 편안하기만 한가.
그래서 요사이 나는 엄마를 위해 보름 동안 시골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밥이며 빨래며 온갖 집안 일에다 밭일까지 다 하느라 힘들었지만 엄마 앞에서는 전혀 내색할 수 없었다.
그리곤 혼자 밭에 나갈 땐 한쪽 귀퉁이에 모셔진 아버지 산소에 절을 하며 얘기하곤 했다.
“아버지, 이젠 엄마 고생 그만 하시게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 지금은 하실 수 있잖아요….”
엄마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엄마는 몹시 섭섭해하시는 눈치였다.
떠나기 전날 시내에 나갔다 오시더니 솥뚜껑 철판과 삼겹살을 사오셨다.
그리고는 내가 밥을 짓고 있는 동안 밭에 나가서 고추며 깻잎, 상추를 한 바구니 뜯어 오셨다.
그날 저녁 나는 엄마와 마주한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밥상을 받았다.
다음날 버스 터미널까지 함께 나와 기어코 30여 분을 함께 기다리다 내가 버스에 올라 출발할 때까지
등을 보이지 않던 엄마는 아마도 버스가 사라질 무렵 손수건을 꺼내 드셨을 게다.
꼬부랑 할머니 우리 엄마!
하지만 난 아직 덜 자란 딸인가 보다.
고등학교 졸업 후 6년 동안 해온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보약까지 얻어다 먹으며 친구들과 빈둥빈둥 놀았지,
그 사이 엄마에게 내려와 볼 생각은 안 했던 것이다.
게다가 좋은 데 취직해 잘 다닌다고 거짓말까지 했으니….
이번에 고향집에 다녀온 뒤로 나는,
밭에서 흠씬 땀에 젖어 일하다가 어두컴컴해진 골목길을 걸어 혼자 차린 부실한 밥상 앞에 앉은 엄마의 얼굴이 종종 떠올라 쓸쓸해진다.
“엄마, 앞으로는 자주 찾아 뵙고,
고기도 구워 드릴게요.
저랑 "짠!" 한 잔 어때요?
사랑해요, 엄마.
늦게 낳으신 이 막내가 잘 모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