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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평화로운 여행이 끝나가던 어느 날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34)

2011-03-29 13:15



기차가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덕분에 하노이 기차역의 이른 새벽 풍경과 마주한다.
선로를 비추는 은은한 백열 불빛 아래로 인부들이 화물을 내리고,
저마다 한 보따리씩의 짐을 진 여행자들은 설렘과 두려움의 날개를 접고 역사 밖으로 나선다.
아직 차가 다니기에는 이른 시간.
역사 처마 아래에 놓인 앉은뱅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쳐 두고 아내와 함께 커피 한 잔을 시킨다.

날이 부옇게 밝아 오면서 짐 지거나 배낭을 멘 이들이 하나 둘 길가로 내려섰다.
일부는 버스를 타려는지 큰 길로 나서고, 또 일부는 줄을 지어 들어오는 택시에 올라탔다.
아내와 나도 그중 한 택시를 잡아탔다.
가이드북에서 보아 두었던 게스트하우스 이름을 댔을 때
그곳을 아주 잘 안다고 호들갑을 떨던 택시 운전사는 어쩌자고 하노이 시내를 뱅글뱅글 돌았다.
비록 하노이가 6년 만이었지만 별로 변할 것 없는 구시가지의 길은 눈에 익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는 5만 동을 요구했다.
나는 아무 소리 없이 3만 동을 건넸다.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그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보이며 히죽 웃었다.
하노이가 처음이 아닌 나는 2만 동이면 충분한 거리라는 걸 잘 알지만 덕분에 하노이의 새벽을 구경한 셈치고 3만 동을 주는 거라고 얘기하고는,
바닥에서 튀는 스콜의 물방울처럼 짜증이 뛰어오르는 걸 애써 누르며 돌아섰다.
뭐라고 불평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러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 역시 그뿐, 곧 차를 돌리고 사라졌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오랜 평화의 시간이 끝나 가고 있는 걸까.

그날 점심,
마침 복날이라고 찾아간 한국 레스토랑에서 홍콩에서 온 두 여행자를 만났다.
그중 한 명의 직업이 "프로페셔널 보디가드"라는데 그의 말로는 한국인 사부를 둔 태권도 유단자였다.
그래서일까, 그들도 우리처럼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적잖이 화가 나 있었다.
다행히도 태권도나 삼계탕이 아니라 하노이 때문이었다.
하노이는 순 사기꾼들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도착 첫날부터 택시 운전사와 함께 뺑뺑이를 돌고 가는 곳마다 웃돈에 거짓말에 질려 버렸던 모양인데,
여행 3일 만에 돌아갈 거라고 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다시는 하노이에 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까지 했다.

새삼 6년 전 하노이를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아내와 난 어느 소설가가 말했던 "하노이에 뜨는 별"을 보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하노이의 하늘은 내내 잿빛이었고, 사람들은 무뚝뚝하고도 지독했다.
새로이 마주한 낯선 자본주의의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각조각 생존의 빛만이 치열하게 번뜩였다.
그때 우리도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
물론 하노이의 시민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여행자의 행동반경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란
너무나 뻔해서 쉽게 분노하고 쉽게 슬퍼했다.

홍콩에서 온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갔다.
그사이 아내와 나는 하노이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여전히 오토바이도 많고 사람도 많고 잡다한 물건들도 많았으며, 커피도 맛있었다.
도시는 바쁘고, 거리마다 시간과 땀내와 삶의 고단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뭐라고 할까. 어떤 강렬한 삶에의 의지 같은 것들이 깡마른 다리에 힘줄이 툭 불거지듯 도시의 골목마다 짙은 명암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낯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꿈만 같다는 생각도 했다.
라오스에서 보낸 한 달 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들,
황토 빛 강물을 따라 한없이 단순하고도 평화로웠던 그 시간들이 언제였나 싶었다.
여행이 끝나 가고 있었다.
하노이는 그렇게 내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라오스와 대한민국 그사이 어디쯤에서 말이다.
여행자는 그렇게 라오스와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삶의 속도가 주는 차이의 수면 위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여행이란 삶의 속도가 주는 "다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
결혼 10년을 맞아, 배낭을 꾸려 47개국을 967일간 누볐다.
그 여정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여행자의 유혹》(공저)에 담았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꿈꾸고 있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여행 같은 삶을 살다> 연재가 끝납니다.
양학용님의 글은 조만간 단행본으로 출간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