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나는 이번에도 분명 제대로 통화할 수 없다는 걸 알고도 또다시 지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기라도 하면 그 아이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다.
올해로 일곱 살된 사랑스런 조카 지환이.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게는 시조카인 셈이다.
지환이 말고도 조카들이 여러 명 더 있지만 유난히 지환이에게 정이 가는 이유가 있다.
지환이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언청이"라는 안면 기형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정도가 매우 심한 편이어서 벌써 두 차례 수술을 받고도 돌이 갓 지난 아기처럼 옹알이하듯 "엄마"라는 말만 겨우 한다.
그러니 또래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놀지 못해 집에만 갇혀 늘 외톨이로 지낸다.
그런 지환이가 얼마 전 말 못하는 답답함보다 더 힘든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토록 지환이를 아끼고 사랑해 주던 엄마가 지난해 말 아빠와 지환이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어른인 나는 지환이 엄마를 백 번 이해할 수 있으련만, 어린 지환이에게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이리라.
사람들은 지환이 엄마에 대해 정이 많고 털털하니 성격 참 좋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그녀가 정상 아이보다 더 사랑스러워하며 보듬어 키우던 지환이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이제 삼십 대 초반인 지환이 아빠가 벌써 몇 년째 놀고 있는데다 간까지 좋지 않아 좀처럼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환이 엄마는 계속 쪼들리는 살림은 둘째치더라도 이제는 집안의 가장인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린 듯 안일하고 태평하기만 한 남편에게 지쳤나 보다.
버젓한 직장도 없이 단칸 월세방에서 말 못 하는 아들과 살아가는 삼촌의 궁색함에 괜스레 화가 난다.
하지만 우리집 형편도 별반 다를 바 없어 제대로 도와줄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있던 재산 다 날리고 우리도 지금 월세집에 살면서 조그마한 낚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어제도 지환인 전화기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만 질러댔다.
난 가슴이 미어졌다.
아무리 내가 “지환아, 지환아!” 하고 불러도 처음 한 번만 대답할 뿐 뭐라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순 없지만 그저 밝고 명랑하던 예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마도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바람막이였던 엄마가 곁에 없어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한 게 틀림없었다.
지환이는 “보고 싶다”고, “엄마 어디 갔냐”고 묻고 싶겠지.
그러나 입술부터 시작해 목젖 부근의 입 천장까지 찢어진 채 태어난 지환이에게 그 긴 문장은 아득함만을 안겨 줄 뿐이다.
아직 한글도 못 떼었다고 하니 글로 표현할 수도 없을 테고,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생살 패이는 듯한 고통을 맛보고 있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전에는 워낙 아이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지환 엄마가 있기에 지환이에 대해서는 정말 걱정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저렇게 조그만 녀석이 덩그러니 홀로 앉아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한 채
그리움만 안고 살아가게 되니 큰엄마로서 알 수 없는 죄책감만 자꾸 밀려 온다.
남들은 새 천 년을 맞은 기쁨에 한껏 가슴 벅차 하고, IMF도 옛말인양 경기가 회복되었다고 술렁인다.
그러나 2천 년, 지환이에게는 어떤 희망이 샘솟을 것인가.
녀석에게 한글도 가르쳐 주고 말하는 법도 연습시켜야 되는데 나는 어찌 해야 할지 걱정만 앞선다.
물론 지환이는 얼마 안 있으면 우리집으로 올 것이다.
삼촌에게 내가 맡아 키우겠다고 말했는데, 아직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게 지환이가 큰 짐이 될까 봐 미안해서 망설이는 것 같다.
하지만 삼촌도 곧 어디든 취직해야 하고 세월이 많이 흐르기 전에 새 가정을 꾸려야 할 테니 결국 지환이는 나의 품으로 안길 것이다.
지환이가 나의 아이들과 잘 어울려 커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가장 절실한 언어치료조차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막막하다.
또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 다시 한 번 상처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늠름하고 자상한 남편도 심하진 않지만 지환이와 같은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행여 지환이와 함께 사는 것이 그이에게 또 다른 가슴앓이가 될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생긴다.
시아버님이 당신의 결함을 안고 태어난 나의 남편을 죽여 버리라고 했듯이,
남편도 지환이의 상처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볼 때마다 거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가 복잡해 온다.
왜 이 같은 대물림이 우리 가족에게 전해져야 할까?
아무튼 이 겨울은 어린 지환이에게 정말 추운 계절일 것이다.
엄마의 자리는 세상 어느 아이들에게나 소중하겠지만,
보고 느끼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환이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였을 텐데….
이 추운 겨울날, 엄마 없는 그곳에서 감기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의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들이 뭇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 받고 무시 당하며 정신적인 고통 속에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면,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생명은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고귀한 것을….
오늘도 작은 방안에서 엄마를 향한 그리움으로 괴성을 질러댈 지환이에게
어른이 될 때까지 이 큰엄마가 최선을 다해 돌봐 주리라 맘속으로 약속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