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그 해 여름은 내 생애에서 가장 끔찍한 나날이었다.
유난히도 깜깜했던 그날 밤,
중3이던 나는 고입 시험을 준비하느라 보충수업을 마치면 독서실에 들러 밤늦도록 공부를 하곤 했다.
그날도 친구 유나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골목길이 더 한적해 보여 유나와 나는 손을 꼭 붙잡고 일부러 크게 웃고 떠들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앞을 지날 즈음 저만치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자애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급한 걸음으로 한 블록을 지났는데 글쎄,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그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놀라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있는 힘껏 뛰었는데 낯선 손이 나의 목덜미를 덥석 붙잡는 게 느껴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겁에 질린 우리는 아무 반항도 못한 채 학교 뒤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유나는 계속 울기만 했고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곧 우리 주위에 남자애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뭐라뭐라 수군대더니 “우리들이 그렇게 무섭냐? 도망가긴 왜 도망가” 하며 다가왔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아이 하나가 내 옆에 꼭 붙어 있던 유나를 떼어 내 팽개치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난 너무 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건가…."
그는 나의 교복치마를 걷으려 했다.
그제서야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그는 내 입을 막으며 복부를 강하게 내리쳤고 나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온몸이 아프고 가눌 힘조차 없어 그대로 누워 있는데 왈칵 울음이 북받쳤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옷이 찢긴 상태로 발견되어선 안 될 것 같아 옷을 여미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진 유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우린 괜찮을 거야” 하고 중얼대며 유나를 힘겹게 부축했다.
그리고 친구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른 뒤 대문 앞에서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땐 내 방이었다.
엄마 아빠는 한잠도 못 주무셨는지 충혈된 눈으로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갑자기 지난밤 일이 생각나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그러자 엄마도 나를 꼬옥 껴안으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부모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나는 엄마가 아빠 앞에서 오열을 하며 우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터져 버릴 것 같았고,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는 유나가 걱정되었지만 애써 그 친구를 잊고 지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가 이 현실을 이겨 낼 수 있도록 곁에서 애쓰시는 부모님 덕에 나의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갔다.
집 밖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웠던 나는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오히려 내 자신이 더 불쌍하고 억울해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개학 날짜가 다가오면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나는 나보다 더 많이 힘겨워했고 수치심과 증오심으로 마음의 병을 얻어 결국 휴학하고 말았다.
나는 유나를 돕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 스스로도 겨우 하루하루를 견뎌 내고 있었기에 나는 그 친구 얼굴을 마주보는 것조차 피했다.
그때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를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 친구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나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실어증과 대인 기피증에 걸린 유나를 만나달라고 했다.
나를 만나면 유나의 말문이 열리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꼭 두 달 만에 나는 유나를 찾아갔다.
아직도 겁먹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에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친구를 보는 순간 나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말해!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일어나란 말이야. 바보같이 대체 왜 이러고 있니?”
사실 나는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나 있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꼬옥 껴안았다.
정말이지 나와 유나를 이렇게 만든 그들을 죽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유나에게는 자신의 아픔을 온전히 알고 있는 나의 도움이 참으로 절실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나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 버젓이 다니고 있으니…."
외롭고 힘들었을 친구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그 뒤로 나는 방과후엔 유나를 찾아가 한참 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혼자 떠들다 집에 오곤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유나는 끝내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다니고 있고 유나는 말을 조금씩 찾아가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머지않아 그 친구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친구만 생각하면 아직도 내 가슴 한 구석이 시려 온다.
어려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은 평생 지우지 못할 것 같다.
"친구야! 미안해.
그때 너에게 내밀지 못했던 손길, 평생 두고두고 갚아 갈게.
이제 얼룩진 우리 사춘기 시절은 멀리 날려 보내고 앞으로는 행복하고 아름답게만 살아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