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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서른 살 총각의 소망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92)

2011-04-02 09:27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자,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할 사이도 없이 자식 넷을 고스란히 책임지셔야 했던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한 시골 살림에 더 이상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벅차셨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큰누님은 얼마 안 있어 객지로 나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작은누님은 눈물을 머금은 채 이모님댁으로 더부살이를 갔다.
집에는 남동생과 나 그리고 어머니, 이렇게 세 식구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우리집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동네에서 1급 생활보호대상자로 정해져 근근이 살아갔다.

평생 허리 한 번 편히 못 펴 보고 고생만 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장남이 이렇게 나이가 서른이 다 되도록 효도 한 번 제대로 못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더욱 죄송스럽기만 하다.

십여 년 전, 형벌과도 같은 그 병이 나에게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도….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날부터 간질과의 외롭고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몸이 건강할 적에는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더라도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내 몸에 간질이란 병이 찾아오고 난 뒤부터는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하찮은 벌레 한 마리만 보아도 괜히 슬퍼지곤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환갑이 넘으신 어머니와 형제들 볼 면목도 없어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졌고 점점 무기력해져 갔다.

집안 형편을 생각해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도회지로 올라가 열심히 공장에 다녔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계 앞에서 발작이 일어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뇌진탕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고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어느 날은 퇴근길 버스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자 벌레 보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해 있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빨리 내리라고 나에게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양 차에서 서둘러 내리고 말았다.

그 비참한 심정이란!
그날은 내 모습이 너무 싫어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스물세 살 혈기왕성한 청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뒤로도 발작은 계속되었다.
육교 위에서 내려오다가 발작을 일으켜 치아를 많이 다쳤는가 하면
화장실이나 오락실, 또 아르바이트 하러 간 당구장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그 놈" 때문에 나는 삶 자체를 거부하고 싶었다.

내 병을 알게 된 친구들이 하나둘 나를 피하고 떠나 버려 마음을 열고 지내는 친구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친구를 만나러 간 날 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결국 그 친구와도 사이가 차츰 멀어졌다.

나는 가끔 바람 부는 들판에 가만히 서 있는 걸 좋아한다.
저녁 무렵 노을 저 너머로 외로움을 한꺼번에 날려 보내고 나면 한동안은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가끔 형제들에게 발작만 일으키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 보고도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혼에 실패하고 아이들 걱정에 마음의 병을 얻고 사는 큰누님을 보노라면 내가 큰 위로를 해드려도 부족할 것 같다.
작은누님 역시 단칸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느라 주위를 둘러 볼 여유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형 대신 자기가 모셔야 된다며 열심히 살고 있는 동생에게 어찌 손을 내밀 수 있으랴.
사실 그 녀석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려앉는다.
형을 생각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과 착한 성품 때문에.

하지만 나는 이런 환경으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
3년 전부터는 한 가지 꿈을 갖게 되었는데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주위에선 이런 질병을 앓고 있는 내가 과연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의문스러워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는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꿈꾸는 일마저 포기한 사람은 비록 건강한 육체를 가졌더라도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분명한 삶의 목표와 내 안의 열정 때문인지 예전보다 몸과 맘이 훨씬 편하고 건강해진 듯하다.

얼마 안 있으면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르게 된다.
비록 몸이 더 악화된다고 해도 나는 꿈을 이루는 그날까지 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부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어느 한 청년의 이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빌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발 발작만은 잠시 멈추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