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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사는 원주 땅에 시인 한 분이 찾아오셨다.
전에 내가 쓴 옻나무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옻나무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원주는 도시 주변의 야산 자락에 옻나무 재배를 많이 하고, 옻을 재료로 하는 칠기공예 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옻나무 밭으로 향했다.
그 옻나무 밭 주위에는 친구인 칠기공예가가 살고 있어 시인에게 소개도 해 주고 옻나무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는데
친구의 집은 잠겨 있어 아쉽게도 만날 수 없었다.
야산 밑에 있는 옻나무 밭으로 들어서자 한창 여름인데도 벌써 옻나무 잎들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아니, 나뭇잎들에 단풍이 들었네요.” 시인이 가을빛 완연한 옻나무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나무 둥치를 자세히 보세요. 왜 단풍이 들었는지?”
어른 팔뚝 굵기의 옻나무에는 타이어 바퀴 같은 상처가 선명했다.
한 나무에 적어도 100개쯤 되는 칼금이 가로로 죽죽 그어져 있었다.
굵게 난 칼금마다 콜타르처럼 말라붙어 있는 검은 옻나무 체액....
시인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시인은 옻 진을 내기 위해 상처 입은 나무의 칼금을 보며 말했다.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제 친구 칠기공예가는 저 옻 진을 보고 ‘피고름’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옻나무는 피고름을 짜내 인간에게 주는 거지요.
물론 그걸 짜내 쓰는 인간이 잔인하지만, 그게 옻나무의 운명이지요.”
그렇다.
옻나무는 자기의 피고름을 내어 인간에게 유익을 주고는 사라진다.
나무 전체에 칼금이 그어져 피고름을 다 토해내면 옻나무는 베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야말로 성스러운 헌신인 것이다.
어느 시인이 “상처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했지만 그런 노래도 옻나무 앞에서는 삼가야 할 것만 같았다.
중국의 노자는 옻나무를 재배하고 옻 진을 내어 생계를 꾸렸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옻나무에서 자신의 인생을 배운다며
이런 말도 남겼다.
그렇다.
옻나무는 자신의 상처에서 토해낸 사랑의 체액으로 다른 존재에 덧칠되어 수백 혹은 수천 년 광택을 발하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옻나무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원형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처를 통해 흘러나온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우리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워 가슴에 밀물져오는 사랑의 신호를 거절하고
상처받을까봐 두려워 타자와 소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 버릴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삶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사랑의 그믐인 것이다.
그날 옻나무 밭을 구경한 뒤 시인은 충격을 받은 듯 오래 침묵을 지키더니 어렵게 입을 떼어 말했다.
“오늘 큰 스승 한 분을 만나고 가네요.”
나는 시인에게 당신의 큰 스승이 어떤 가르침을 베풀더냐고 묻지 않았다.
옻나무가 몸으로 한 말을 시인의 입을 통해 다시 들을 필요야 없지 않은가?
<고진하/시인·숭실대 겸임교수>의 “큰 스승 옻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