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미래를 위해 적금도 붓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구청을 통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가출하여 장
애인인 할머니와 어렵게 사는, 초등학교 1학년과 여섯 살인 미경·미란이 자매를 소개받았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남달리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두 자매를 친언니같이 사랑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일주일에 두세 번쯤 미경이네 집에 들러 함께 공부하고 떡볶이도 사 먹고 목욕탕에도 데리고 갔다.
가끔 미란이는 “미경 언니가 요즘 공부 안 해. 혼내 줘요” 하고 투정어린 전화를 해 오기도 했는데,
그런 아이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 즈음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내게 그는 내가 정성으로 돌보는 아이들이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라며 내 뜻을 잘 이해해 주었다.
그는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고, 아이들도 그를 잘 따랐다.
우리는 언제나 넷이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결혼한 뒤에도 미경 자매를 계속 돌봐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한 달 뒤에 꼭 갚겠으니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해 왔다.
친구 사이에도 일체 돈 거래를 하지 않았던 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서로 신뢰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던 그를 굳게 믿고 1,500만 원이란 큰돈을 대출해 준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혹시나 교통사고를 당한 건 아닌지 하루하루 걱정이 늘어가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과 2범이며 이미 두 아이와 부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또 있을까.
그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돈도 돈이지만 굳게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난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게 접근해서 사랑한다 고백하고, 미경 자매를 아낀 것, 내게 약속했던 것 모두가 그의 철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IMF 이후 전 재산을 30년지기 친구에게 잃어버린 부모님께서 잦은 불화로 결국 이혼을 하셨다.
반겨 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집안 사정도 복잡한데
나마저 방황하는 걸 보고 동생들이 마음 아파할까 봐 집에서는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절친한 친구에게서 “똑똑한 줄 알았더니 헛똑똑이였구나…”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막막해진 가슴을 치며 울 뿐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미경 자매와 멀어졌고 영문 모르는 친구들에게도 또 회사 일에도 소홀해졌다.
그런 내 삶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도 생각해 봤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밤마다 깜짝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우는 날이 많아졌다.
몇 달 동안을 술과 눈물로 보내는 동안 나는 그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사람들도 미웠고 세상도 미웠다.
그러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모습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엔 좋은 일도 선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고 믿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새롭게 내 자신을 추스르고 용기를 내어 미경이네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미경이 할머니께서는 정이 그리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된다며 다신 오지 말라고 하셨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울며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그 뒤 가끔 미경이와 미란이가 보고 싶어서 몰래 전화하면 아이들은 할머니가 만나지 말라고 했다며 나를 피했다.
속상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나를 통해 세상의 악하고 불행한 면을 보게 될까 봐 할머니 말씀을 듣기로 했다.
그러나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는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지…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지금 그는 10개월 형을 선고받아 수감중이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처음부터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사랑한다는 편지를 계속 보내 온다.
정말 진실일까 의심도 해보지만 서로를 위해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처음보다 덜 아파하고 덜 울고 회사생활도 잘 해 나가고 있다.
비록 앞으로 5년 동안이나 월급의 반을 빚으로 갚아야 하는 처지지만,
그래도 매달 적은 돈을 익명으로 미경 자매에게 보내고 있기도 하다.
언젠가는 그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으며.
가슴 아프게도 이제 나는 남자를, 아니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내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지레 겁부터 먹는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언젠가 내게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에 불규칙했던 생활을 바로잡고,
퇴근 뒤에 운동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재활원에 가서 장애인들도 돌보며 지내고 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